정수기 청소.
필터가 있지만 계자 전에는 연결선들을 떼어 내고
바닥의 맥반석이며 다 꺼내 닦고 뜨거운 물로 튀긴 뒤 볕에 바짝 말려서 들이는.
낼부터 흐린다는 소식에다 미세먼지도 넘친다 하기 서둘러.
희중샘이 문자를 보내왔다.
계자에 귤을 보내겠다 했다.
장 볼 때 참고하라고. 고맙다.
그의 20대를 물꼬에 바쳐 물꼬가 굴러갔다.
그의 30대는 논두렁으로, 가끔 품앗이로도 움직이는 그다.
여전히 그에 기대는 바 적지 않다.
물꼬의 동지들(당연히 아이들 포함)로 아직 여기 나는 산다.
식구들이 영화 <노량>(김한민 감독) 보다.
<명량>, <한산>과 더불어 이순신 3부작이라는.
잘 봤다. 전쟁영화로서 잘 만들었다?
그런데 전쟁영화를 잘 그린다는 건 어떤 걸까?
어떤 식으로든 그 참상을 지울 수 없을.
전쟁을 하겠다는 이들에 별 의미도 가치도 없이 동원되는 그 많은 사람들이라니.
7년의 임진왜란 막바지,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명군과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내전을 대비하러 집으로 가야만 하는 왜군과
전쟁을 치른 땅에서 이제 어디가 집일 것인지 멀고 먼 조선군.
그 모두의 마음이 헤아려져 아렸다.
전쟁을 치르는 남성들도 남성들이지만
여성들의 삶은 또 어떠했을 것인가.
착잡함이 스미는 속에 영화는 막바지로 가고 있었다.
아쿠, 이 마지막은 무엇이란 말인가.
‘열도 끝까지 쫓아가 항복을 받아내야 한다’는 이순신?
일본군의 전투력을 약화시켜 재침략을 막으려는 큰 뜻보다
복수가 더 강해 보인다.
‘우리 장군님’(하하, 우리 집에서 그리 불린다)이 전쟁광이자 복수자?
그러자니 영화는 길어지고.
감독의 가치관이겠으나 아쉬웠다.
“마지막이 베러부렀다!”
대체로들 동의했다.
하지만 안다. 늘 말하기는(평하기는) 쉽다.
애썼다, 저런 영화가 만들어지기까지 함께했을 손발들.
지난 역사를 짚고 오늘을 보려는 시도들,
그리고 우리 삶의 어떤 방향들을 생각해보게 하는 질문들,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