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 자로서 아픈 그대에게.
글월을 받고 같이 아팠네.
무슨 말로도 위로가 어려울.
“밥부터 드시게!”
내가 단단해야 그를 제대로 추억할 수 있지 않겠는지.
아파하는 우리를 보는 게 떠난 그는 또 어찌 편할까.
잔인하게 들릴 지도 모르겠으나 먼저 충분히 슬퍼하자 말하겠네.
달이 차야 기울듯 무슨 일이나 '다 해야', 그 끝에 이르러야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더군.
그러므로 눈물을 이제 거두라고도 말하지 않겠네.
그대의 상심을 결코 다 안다 말하지 못하리.
그런데 우리 알지 않은가, 우리는 그 누구도 우리 자신에게 속한다고 하지 못함을.
인간은 결코 그 누구에게 속할 수 없지.
우리는 다만 어느 특정한 한 순간을 같이 보냈던 것.
그건 누구의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같이 보낸 시간.
흔히 그러더군, 인간은 추억에서 사라질 때 죽는다고.
죽은 자는 산자 곁에 그리 남는 거다 싶으이.
거듭 말하지만 우리가 단단해야 떠난 이를 잘 추억할 수 있지 않겠는지.
그런데 말이지, 우리 마음에서까지 그를 굳이 떠나보낼 필요는 없지 않을지.
지금은 너무 아프니 어여 보냈으면 하는 마음이 들 수도.
떠난 이들은 어떻게든 우리 안에서 같이 살지 않더뇨.
나는 떠난 이로 설혹 아파도 그를 알았던 시간에 감사하네.
그리움은 결코 옅어지지가 않던데,
그래도 그리운 슬픔을 택하겠으이. 위로가 안 되겠지만...
북미 인디언들의 이야기에 그런 말이 있었더라.
‘인간은 사람들의 추억에서 사라질 때 죽는다.’
그가 죽어도 우리는 떠나지 않음.
우리가 잊는 것은 기억일 뿐 그와 보낸, 그래서 우리 몸에 남은, 그와 쌓은 정서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지. 우리 삶에 그대로 녹아있는.
그리하여 어느 날 우리 앞에 불쑥불쑥 되살아나는 그이들이라.
인간은 죽어도 인간의 성분은 우주가 소멸될 때까지 사라지지 않는다지 않던가.
그러니 그도 나도 그런 의미에서 우리 영생이라.
그가 떠났지만 떠나지 않았으니
우리 그를 기쁘게 잘 만나도록 지금 밥부터 먹으세나!
설이 머잖았다.
벌써부터 안부를 여쭙거나 인사를 해오거나.
이곳에서는 여름과 겨울 계자를 갈무리하고 인사를 건네기도.
집안 어르신들께 두루 안부를 여쭙고.
지리산에 살던 동료가 일을 접고 안동 산골로 가 사과농사를 짓는다며
이 설에는 사과를 보내겠노라는 무범샘의 문자도 들어왔다.
명절은 잊었거나 잊히거나 했던 이들도 떠올리고,
잊지 않고 있다 인사를 넣을 말미를 얻게도 되는.
겨울계자를 보내며 목에 머물던 감기가 좀 털어져
비로소 편하게 씻고,
집의 묵은 먼지들도 좀 털고.
교문 안쪽의 패인 곳에 연탄재를 깨 넣었다.
차가 오가며 누르고, 다시 그 위로 깨고,
봄이 오고 마지막 연탄을 화로에서 꺼낼 때까지 그러할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