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5.24.흙날. 맑음

조회 수 1290 추천 수 0 2008.06.01 00:15:00

2008. 5.24.흙날. 맑음


아이가 퇴원을 합니다.
아주 이삿짐이었지요.
4인실을 우리만 내내 쓴 덕에
빨래도 해서 널어가며 살림을 살았더라니까요.
마침 읍내 장날이어
수세미, 박, 방울토마토, 피망 모종을 좀 사고
이것저것 필요한 것들도 사서 싣습니다.

점심때가 훌쩍 지나 끼니를 밖에서 챙겼네요.
온 식구들이 읍내 갈 때면
한 번씩 들어가던 아주 맛난 칼국수집입니다.
“칼국수 맛이 좀 피곤해졌다.”
아이가 그랬지요.
정말 국물도 연해지고
땡끌댕글 쫄깃거리던 국수 가락은 다 풀풀 풀어지고
입에 감기던 맛이 영 없어져버렸댔거든요.
맞아요, ‘맛이 피곤해졌’던 겁니다.

돌아오는 차에서 아이는 자꾸 되냈습니다.
“좋은 시절 다 갔겠다... 꽃들 다 피고 졌겠다...”
감꽃을 젤 궁금해라 했지요.
그가 참 사랑하는 꽃이지요.
대해리로 돌아와 아이는 목발을 짚고 폴짝거리고 다닙니다.
감자밭도 가고, 고추밭도 가고, 꽃밭도 가고...
훌쩍 올라가버린 기온에
열무는 제대로 크지도 못하고 웃자라 모다 꽃을 피우고 있었지요.
잘아서 더 크기는 글렀다 싶던 아욱은
그래도 조금씩 아주 조금씩 안간힘을 쓰며 오르고 있었습니다.
“엄마!”
아이가 멀리서 부릅니다.
“선물!”
한 움큼 쥐고 있던 딸기를 내밀었지요.
고새 밭딸기도 다 익어있었습니다.
<대해리의 봄날>에 왔던 아이들 생각이 나데요,
너들이 있었으면 얼마나 잘 따먹었을까 하고.
어쩜 그 딸기들은 다 따먹지도 못하고 뭉그러질 겝니다.
익고 익은 오디며 산딸기며도 바닥에 떨어져 뒹굴 겝니다.
산골에 아이들이 없습니다...

해지는 저녁답,
마당가에서 아이와 앉았습니다.
아, 얼마나 오고 싶어 했던 골짝이던지요.
몇 년이나 나가있었던 사람들 마냥,
아주 멀리 떠나있었던 사람들 마냥
감회롭게 앉아 우리 사는 삶에 대해 얘기를 나누고 있었지요.
“내가 널 이 산골에서 키우는 게 정말 맞는 걸까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그러자 아이 왈,
“엄마, 왜 다른 데로 갔으면 더 나빠질 수도 있었다는 건 생각 못 하셔요.”
다 채워지진 않지만, 별 삶이 없고 별 길이 없다,
그래서 여기가 나는 좋다,
아이가 그런 말을 다 하더이다.
그러게요, 그래요...
몇 해 전 큰 좌절 앞에 그렇게 위로해주던 아이였지요.
“저는 엄마가 옳다는 걸 알아요.
엄마, 엄마의 길을 가세요.
저도 엄마를 좇을 거예요.”
고마울 일입니다, 참 고마울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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