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12. 2.물날. 맑음

조회 수 934 추천 수 0 2009.12.15 14:13:00

2009.12. 2.물날. 맑음


“교장선생님, 잘 지내셨어요?”
그렇게 시작하는 글월 하나 닿았습니다.
소리를 지를 뻔하였지요.
초록이라는 퍽이나 참했던 친구입니다.
“친구들과 맛있는 부대찌개를 해 먹던 기억,
참치캔을 뜯다가 손가락을 심하게 베어서 피가 철철 났던 기억,
고무줄놀이, 강강수월래, 연극, 장터 나들이 등등...
물꼬는 어린 저에게 잊을 수 없는 추억들을 남겨주었지요.”
어린 그가 약속했다 합니다,
크면 꼭 이 곳에 선생님으로 다시 오겠다고.
“스물세 살이 된 지금, 그 약속을 지키려고 합니다. 조금 늦었지만요.”
또 다른 글월도 있었습니다.
“물꼬가 너무 그립고 보고파요.
신정 연휴 땐 시간을 낼 수 있을 것 같은데...”
계자 전 잠시 일손도 보태고 간다는 제자의 소식입니다.
여기 살아서 참말 좋습니다.

아이랑 마늘밭을 고릅니다.
배추 뽑은 밭에다 마늘을 놓게 되니
어째 해마다 우리 마늘이 마을에서 젤 늦습니다.
그러면 또 늦게 거둬 먹음 될 테지요.

마을에 물이 나오지 않습니다.
작은 공사가 있었지요.
이틀이 될지도 사흘이 될지도
아니면 더 길어질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래도 다 살아가집니다.
덜 씻고 덜 쓸 체제를 갖추면 되지요.
도시라면 어쩔 것인지요,
이럴 때도 산골 살아서 정녕 좋습니다.

아이에게 매실효소를 정리하는 일을 맡겼습니다.
이곳저곳 흩어져있던 것과
다른 유기농농가에서 온 것들이랑
모다 한 항아리에서 다시 숙성의 시간을 기다리자 하는데,
아이는 통마다 끄트머리 묻어있는 것들이 아깝다고
일일이 물을 조금 붓고 씻어내 모아 컵을 채워서는
식구들을 두루 주었지요.
맛나서도 그렇겠지만,
참 기특합디다.
세상이 어떻든 아이들은 무사히 자라나고 있는 게지요.

손가락이 아플 정도의 두 시간짜리 빽빽이 시험을 하나 치르고 왔습니다.
가끔 미련한 일들도 마주하며 날이 갑니다.
실력을 가늠하게 하거나
뭘 알게 하는데 도움도 안 되는
이상한 절차를 만나기도 하지요.
가치가 있다면 하루 종일이라도 쓰고 있겠지만
교수 자신도 모르는 쓰잘데기 없는 문제를,
도대체 평가척도가 되지도 못할 것들을 나열해놓은 걸 보며
짜증 좀 내기도 하였답니다.
하지만 과정이라면 그저 해야지요, 하면 될 것입니다.

젊은 친구의 하소연이 있었습니다.
“10기가짜리를 8기가나 쓴 usb도 잃어버리고,
그룹과제들 잘 된 게 없고, 이상한 것에 시간 다 뺏기고.......”
자신이 움직이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는 모둠과제 동료들,
다들 개인과제만 하고
심지어 모둠과제는 떠넘기면서 개인과제는 자신의 것만 베끼고,
학교 다닐 맛이 안 나고
너무 괴로워 본의 아니게 사람들을 미워하게 된답니다.
게다 자신이 한 작업에
악의적인 평가를 노골적으로 하는 경쟁심 많은 동료도 있고
서로가 한 작업에 피드백을 해주는 자리에서
자신의 것에만 폄하하려고 한 의심이 갈 정도로 엉망인 피드백이 달리고...
물꼬일도 많을 텐데 평가준비는 엄두도 못 내고 있을 거라고
꼬박 세 시간도 넘게 정리한 공책을 기꺼이 챙겨 보내주는
성격 좋고 착하고 게다 성적도 최고 좋은 친구입니다.
어른이라고 할 수 있는 일이 무에 있으려나요.
그저 글 한 줄 보내지요.
“...그런데 말이다,
미움이 일고 화가 나고, 그런 거 다 자연스러운 거란 사실이다.
자연스러움!
당연히 그런 감정이 일어나는 거군, 지금 좀 우울하네, 지금 화가 나는군,
그리고 모든 감정은 그렇게 일어났다가 사라지지.
물론 때로 다시 곱씹어져서 노여워지기도 하지만.
시간은 힘이 세고,
다른 방법이 없을 땐 시간에 기대야지, 뭐.
일단은 시험에 집중할 것!”
그리고 얼마 전 쥐고 있었던 인디언 책 한 구절 옮겼지요.
“이런 구절이 있더구나.
‘모욕적인 말들이 상처를 안겨줄 수도 있지.
하지만 네가 그렇게 되도록 허용할 때만 그래.
만일 바람이 너를 그냥 스쳐 지나가게 하는 법을 익히기만 한다면
너를 쓰러뜨릴 수도 있는 그 말들의 힘을 없애버릴 수 있어.’
인디언 조셉 M. 마셜 3세가 할아버지로부터 배운 지혜였지.
내겐 이 말이 한참을 위로가 되더구나.”

글고,
달골 식구들 서울서 내려오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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