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4. 9.쇠날. 맑음

조회 수 891 추천 수 0 2010.04.18 12:17:00

2010. 4. 9.쇠날. 맑음


늦도록 학교 뒤란은 부산했습니다.
3월 빈들모임을 끝내고 잠시 숨 돌리던 바람 몹시 불었던 오후,
보일러 배관실로 작은 화마 하나 다녀갔더랬지요.
잠시 다니러온 종대샘, 어제는 그 부위를 뜯어내고
오늘은 다시 순환모터를 달고 그곳을 이었습니다.
어둠이 내릴 때까지 하고 돌아갔답니다.
고맙습니다.
저런 재주 많은 이가 정작 산골서 살아야는데...

드디어 집을 떠나 있던 아이를 데리러 갑니다.
아이가 아침부터 싸두었던 짐이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곳 사람들을 위해 밥상 한 끼 차립니다.
며칠 전 물꼬 식구들이 월남쌈을 먹었던 터라
꺼내놓았던 쌀종이를 거기까지 들고 갔습니다,
혹여 가까이서 살 수 없을지도 모른다 싶어.
그런데 어디나 가면 사람들과 우르르 모이게 됩니다,
물꼬에서 살던 가락처럼.
아이가 오며가며 인사를 잘한 덕에,
그도 그럴 것이 남들은 학교 가는 시간에 아이가 돌아댕기니
궁금해서도 입에 올려졌겠지요,
사귄 이웃들이 더러 있었습니다.
마침 물꼬에 드나들 나이의 아이들이 있는 한 이웃은
아이 낼 간다고 산골서 귀한 미더덕을 한아름 들고 왔습니다.
건너와 쌈도 같이 먹고 오래 이야기 나누었지요.
“몇 해를 살아도 처음 들어와 보네요.”
아저씨까지 함께 오셨지요.
“팔자다야, 요까지 와서 상담을 해야 되고.”
아이의 이모할머니가 그러셨네요.

지난 겨울 계자의 어느 아침
아이들에게 들려준 돈 많은 고명한 술탄 이야기가 있었지요.
인도양 해변의 산들바람이 선선하게 드는 술탄성은
아라비아에서 가져온 진귀한 보석과 비단,
그리고 기분 좋은 향내로 가득했습니다.
하지만 술탄은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아내가 여럿 다투었고 아들은 싸웠으며 딸들은 토라졌지요.
사고 싶은 건 뭐든 살 수 있었지만 행복이나 만족은 얻지 못했습니다.
한 날 하인에게
가서 진실로 행복한 사람을 찾아라 하였는데
세상을 돌아다니던 그는 작은 우물가에서 가난한 남자 하나를 만납니다,
바싹 마른 낙타에게 먹이기 위해 물을 길으며 노래를 부르는.
낙타의 젖을 짜면서도 흥얼거리던 그는
얼마 되지도 않는 젖을 술탄의 하인들에게도 나눠주었습니다.
“당신은 행복한가요?”
“행복하지 않을 일이 있나요?”
성으로 데려갔겠지요.
가는 길에 만난 도시에는 그가 본 적이 없는 것들이 많았습니다.
수많은 사람들, 여러 가지 색깔, 각자기 냄새와 맛이 나는 것들...
술탄은 그에게 진귀한 과일과 달콤한 사탕을 후하게 대접하고 잔치를 엽니다.
“행복의 비결을 알려주게.”
그런데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사막에 살 때 자신을 기쁘게 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생각이 나지 않았지요.
그냥 행복하다고 느꼈을 뿐입니다.
술탄은 실망해서 그를 좇아냅니다.
그는 자신의 낙타와 나무로 깎은 우유 그릇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지요.
그런데 술탄의 성에서 본 온갖 놀라운 것들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 더는 다시는 행복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아이의 40여일도 그런 날들 아니었나 모르겠습니다.
이모할머니는 심지어 빵에 쨈을 바르는 것까지 해주었답니다.
아이가 집안일이며 손끝도 까딱 않고 지낸 게지요.
“아이구, 그 산골 너거 집에 돌아가면 얼마나 고생할까 싶어 짠해서...”
그래서 더욱 아무것도 시킬 수 없었다 합니다.
아이가 일상으로 잘 돌아와얄 텐데요,
여전히 산골서 행복해얄 텐데요...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수sort
3204 2010. 7. 6.불날. 맑음 옥영경 2010-07-16 892
» 2010. 4. 9.쇠날. 맑음 옥영경 2010-04-18 891
3202 2017. 9.10~11.해~달날. 밤부터 이튿날 오전까지 비 옥영경 2017-10-19 891
3201 충남대 사범대 Work Camp(1.15~17) 갈무리글 옥영경 2016-01-19 891
3200 2013. 4.25.나무날. 비 갬 옥영경 2013-05-08 891
3199 2012.12.21.쇠날. 눈 옥영경 2012-12-28 891
3198 10월 빈들 닫는 날, 2012.10.28.해날. 갬 옥영경 2012-11-10 891
3197 2010.10.29.쇠날. 흐려가는 옥영경 2010-11-10 891
3196 2010. 5.22.흙날. 흐림 비 옥영경 2010-06-03 891
3195 2019. 3.21.나무날. 바람 불고 비온 끝 을씨년스런 아침, 하지만 맑음 / 도합 일곱 시간 옥영경 2019-04-04 890
3194 2017.12.18.달날. 잠깐 눈발, 오랜 바람 / 아름다운 시절 옥영경 2018-01-17 890
3193 2013. 5. 9.나무날. 흐리다 비 크레센도 옥영경 2013-05-19 890
3192 2013. 1.28.달날. 흐리다 맑아감 옥영경 2013-02-12 890
3191 2010. 4.19.달날. 흐림 옥영경 2010-05-08 890
3190 2017. 3.24~26.쇠~해날. 맑고 흐리고 맑고 / 불교박람회 옥영경 2017-04-19 889
3189 2016.10.30.해날. 청아한 하늘 옥영경 2016-11-14 889
3188 2013. 9.25.물날. 차츰 개는 아침 옥영경 2013-10-03 889
3187 2013. 3. 4.달날. 맑음 옥영경 2013-03-25 889
3186 2012. 9.27~28.나무~쇠날. 맑다 이튿날 저녁 비, 그리고 한밤 달 옥영경 2012-10-21 889
3185 2009. 9.21.달날. 비 옥영경 2009-09-30 889
XE Login

OpenID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