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11. 4.쇠날. 흐림

조회 수 981 추천 수 0 2011.11.17 03:20:40

 

 

아침 안개,

그리고 종일 흐렸던가요.

사실 날씨가 어쨌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단식 나흘째.

어제부터 시작된 역류현상으로 몸이 진이 다 빠지더니

그 위로 또 솟구쳐 오르는 속에 것들,

꼬박 한 달을 해온 대배 백배와 선정호흡도

오늘은 엄두도 내지 못하였습니다.

 

사흘 단식을 마무리 한 아이는 보식 첫 끼니를

스스로 잘 챙기고 있습니다.

미음을 쒀서 때마다 늘려가며 먹고 있지요.

굶는 거야 어디 일이던가요,

음식을 들어가는 순간 자석처럼 먹을 것들이 당기기 마련인데,

용케 그 순간을 잘 견뎌내고 있습니다.

그런 절제의 순간은 자신의 삶에 좋은 거름이 될 겝니다.

 

식구들은 개울로 나가 은행 껍질을 으깨 거르고

씻은 것들을 평상에 말리기 시작합니다.

비닐을 덮었다 벗겼다 하며 여러 날을 보낸 뒤면

안으로 들여 겨울날 우리 새끼들을 흡족해할 것이랍니다.

 

축 축 늘어진 몸을 추스려

한낮, 잠시 마당을 걷고 풀 밭 위에서 볕을 바래었습니다.

볕...

여기 살아서 다행입니다.

가만가만 호흡을 잡는 것으로 수행을 대신합니다.

단식 나흘이면

배의 앞 가죽과 뒷 가죽이 붙으며 명징해지는 의식의 상쾌함을 맞는데,

이번은 퍽 지독하게 보내고 있습니다.

기진맥진한 속에 겨우 정신을 수습하며

지난 생활의 반성과 함께, 이것은 몸의 어떤 반응인지를 살핍니다.

그간 7일 단식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으며

팔팔하게 일상 활동 다하고 심지어 식구들 밥까지 해먹이며,

언젠가는 입학사정면담까지 며칠을 진행하며도 단식을 했더랬습니다.

단식을 하며 정해진 기간이 끝나기 전에 멈추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도 없으며

그만큼 가뿐하게 보내며 날마다의 수행과 산골 삶이

몸을 건강하게 하고 있구나 새삼스레 고마워하고는 했지요.

그런데, 처음으로, 그만 하고픈 생각이 일었습니다.

그래도 고비를 넘겨보자,

그 다음엔 다른 희열이 있으리라, 또 그리 날을 잇는다지요.

 

그리고, 아, 굶는 이들의 고통을 처음으로 생각해본 듯합니다.

북한어린이돕기에 발 벗고 나서면서, 결식아동돕기를 팔 걷고 하면서도

그 고통을 헤아리는 일에, 저, 무심했습니다.

눈물이 흘렀습니다.

먹지 않음이 고통일 수도 있다는 걸,

몰랐던 게지요, 참 몰랐던 게지요.

다시 저 바닥까지 다 게워낸 뒤

그저 모관운동 겨우 하였습니다,

풍욕, 합장합척운동, 붕어운동, 뒤통수냉각법 다 놓고.

무엇을 먹었던가, 무엇을 입었던가, 어떻게 생활했던가,

지난 두 달을 이리 뒤집고 저리 뒤집으며

좋은 반성의 재료로 쓰고 있습니다요.

감기 증세도 좀.

그나마 날씨가 차지 않아 얼마나 다행인지요...

 

저녁 밥상에 같이 앉기로 한 손님 한 분 계셨기,

그래도 꾸역꾸역 몸을 일으켜 이것저것 좀 장만합니다.

싱싱함이 가기 전 홍합도 끓여내고.

잠깐 그리 움직이고 나니

사흘 단식을 푼 아이가 나머지 일들을 맡아 합니다.

아이들의 생기를 따를 수 없는 일이 잦으면

그것도 늙어감이라 하겠지요.

휴우, 퍽 긴 하루입니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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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1월 4일 쇠날. 더움 마지막 가을 더위 / <보식 첫날>

 

  오늘은 엄마가 죽기 일보 직전이다. 내려오지도 못하고 오전 오후 내내 달골에 있었다. 정말 큰일이다. 엄마가 힘드니 안마며 보식음식을 만들어야 하는 나도 힘들다. 특히 엄마가 기운이 빠진 만큼 나도 기운이 빠져 우울하다.

  나는 오늘 푸드를 섭취해서인지 팔팔하다.

  아침에는 내가 직접 미움을 만들어 먹게 됐다. 쌀을 갈고, 물을 넣어 끓이면 미음이 된다고 엄마가 레시피를 해주었는데 막상 해보니 엉망이다. 쌀이 굳어서 떡이 됐고, 죽 전체가 한 덩이가 됐다. 결국 불로 잘 놀여서 먹을 만한 미음을 만들어 먹었다.

  저녁에는 엄마가 한 홍합국의 국물을 섭취했다. 정말 맛있고 배부르다. 내일 야채죽을 해먹으면 더 기운이 날 것이다.

 

(열네 살, 류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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