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8.14.불날. 흐리다 비

조회 수 980 추천 수 0 2012.09.09 04:31:06

 

 

다큐멘터리를 한 편을 두 사람이 같이 보고 있었습니다.

거기 밥상이 나왔지요.

“아, 단감이다!”

“와, 갈비 맛있겠다...”

단감을 좋아하는 이에겐 단감이, 갈비를 좋아하는 이에겐 갈비가 보였던 것.

“나는 사실 단감 있는 줄도 몰랐는데...”

“나도 갈비 있는 건 못 봤네...”

우리 눈이란 게 그런 거지요...

 

느린 아침.

계자가 훑고 간 학교의 아침은 그러합니다.

아이가 돌아오고,

하루를 머물던 이가 돌아가고,

그리고 건호 윤호네에서 선물이 왔습니다.

장작놀이를 위한 화덕과 해먹과 야외용 의자들 여러 개.

지난해에도 그렇게 왔던 해먹과 야외용 의자들을 잘 써왔더랬지요.

고맙습니다.

 

부모님들과 통화.

해를 거듭하며 아이를 만나고 그 아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건

무어라 해도 고마운 일입니다.

어느새 이야기는 아이 삶을 넘어 우리 어른들의 이야기이고

사람 사는 일에 대한 통찰로 이어지지요.

어떤 이야기이건 그건 삶을 관통할 수밖에 없는 것일 테지요.

 

천산원정대 후기 원정이 와칸계곡으로 잡혀

동행하자는 부탁이 지난 7월 있었으나

결국 접었습니다.

물꼬가 여름 일정 하나를 취소한 걸 어이 알고

일정이 그리 움직이기 좋게 잡혔냐 반기기도 잠깐

집안 일로 모든 활동을 거두어야 할 일이 생겨버렸던 거지요.

9월에 떠나리라던 티벳길 또한 그렇게 접었지요.

지금 이 순간 어떤 일도

지금 이 자리에서 머무는 일만큼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그 와칸계곡행을 나선다는 소식 들었습니다.

건강한 걸음이시길.

 

때로 내게는 남아있지 않은 글이 엉뚱한 곳에서 발견되기도 합니다.

10여 년 전에 끄적인 한 글이 여전히 어떤 의미에서의 유효성을 가지고 있을 때

반가움보다 두려움 비슷한 것이 엄습하고는 하지요.

고여있음(성장멈춤이라는 이름으로 대체 가능한)에 대한 거북함 같은 것일까요...

김기덕 영화가 두 편 와 있고,

열어보자며 그때 그 글도 다시 읽어봅니다.

시카고에서의 봄날이었습니다.

자신의 삶에, 지금 여기 이르기까지 쌓인 날들이 그리 있을 테지요...

 

 

2003.03.22. 17:40

 

며칠 전 타운의 카페테리아에서 영화 얘기가 한창이었지요.

다들 한 마디씩 합니다.

새삼 영화란 놈이 얼마나 공유의 범위가 큰가를 실감했더랬습니다.

김기덕의 <해안선>도 나왔지요.

본 사람들의 이야기가 분분합니다.

김기덕의 다른 영화들이 그러하듯이.

 

저는 김기덕의 영화를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1997년 <악어>(1996년)를, 영화작업하던 친구에게서 구해다 본 뒤로

그의 지독한 상징(이렇게만 말할 수도 없는)을 사랑하게 되었지요.

(돌아보니 퐁네프의 연인들이 겹쳐지기도 했던 듯.)

정말이지 지독한 상징!

거칠기 이를 데 없었는데도 그의 출현이 얼마나 설레게 했던지요.

그 해 <야생동물보호구역>을 지지거리는 속에 보았습니다.

산만하기가 또한 이를 데 없었는데도

묘하게 사람을 붙들고 집중케 했습니다.

그의 존재가 궁금해지더이다.

무엇이 그를 관통하고 있는 걸까...

99년의 <섬>은, 나름대로 유명세를 타서,

그런 만큼 말도 많았더랬지요, 그 광기에.

그런데 재미나게도 정작 그의 영화는

말수가 적습니다.

제가 그의 영화를 사랑하는 두번째 까닭입니다.

그는 말하는 법을 알고 있는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마찬가지 말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세 번째 까닭은 냉랭한 시선 때문입니다.

그의 영화가 아무렇지도 않은 냉랭한 시선을 유지하기 때문이지요.

마치 나랑은 관계없는 듯 하는

그 거리유지의 시선 말입니다.

 

그 스스로 스토리 작가여서 그렇기도 하겠습니다만

그의 영화가 갖는 엄청난 집중력도 사랑합니다.

물론 스팩터클한 영화들이 다 그러하긴 하죠.

그러나 그의 영화는 저예산 영화일 때가 그렇습니다.

도대체가 한 장면도 놓칠 수가 없습니다.

 

현재를 과거처럼 말하는 그의 이야기 방식도 사랑합니다.

그래서 그의 이야기는 까마득하게 들리지요.

그러나

영화자막이 오르고 극장 불이 켜지고

별일없이 집으로 돌아와 밥 먹고 씻고 자고

몇 날이 아무렇지도 않게 흐른 뒤,

불현듯 그의 영화장면은 생활 구석구석으로 들어오고

그래서 그만 마치 내 일상인 듯 여겨집디다.

2001년의 <수취인불명>이 특히 그랬지요.

<파란대문>도 그러하였지요만은.

그 아득한 듯한 옛이야기가

얼마나 리얼한 현재이더이까.

 

때때로 그의 영화에서 시인 기형도를 만나기도 하는 재미,

그를 사랑하는 또 하나의 까닭입니다.

 

* 뱀다리:

참,

그의 영화를 보고 나올 때 더러 듣는 얘기가 있습니다.

찝찝하다는 거요.

혹 당신도 그러하다면

그 찝찝함의 본질, 정체를 규명해보려는 시도가

그의 영화를

이해하거나 사랑하는 길 하나 되지 않을까 싶네요.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이름 날짜sort 조회 수
3566 152 계자 닷샛날, 2012. 8. 2.나무날. 흐리다 갠 뒤 소나기, 그리고 휘영청 달 옥영경 2012-08-04 1236
3565 152 계자 닫는 날, 2012. 8. 3.쇠날. 맑음 옥영경 2012-08-05 1237
3564 152 계자(7/29~8/3) 갈무리글 옥영경 2012-08-05 1315
3563 2012. 8. 4.흙날. 맑음 / 153 계자 미리모임 옥영경 2012-08-06 1242
3562 153 계자 여는 날, 2012. 8. 5.해날. 맑음 옥영경 2012-08-06 1162
3561 153 계자 이튿날, 2012. 8. 6.달날. 맑음 옥영경 2012-08-08 1272
3560 153 계자 사흗날, 2012. 8. 7.불날. 맑음 옥영경 2012-08-09 1144
3559 153 계자 나흗날, 2012. 8. 8.물날. 살짝 구름 지난 오전 옥영경 2012-08-10 1426
3558 153 계자 닷샛날, 2012. 8. 9.나무날. 안개비 아주 잠깐 옥영경 2012-08-12 883
3557 153 계자 닫는 날, 2012. 8.10.쇠날. 비 옥영경 2012-08-13 1237
3556 153 계자(8/5~8/10) 갈무리글 옥영경 2012-08-13 1527
3555 2012학년도 가을학기(9/1~11/30), ‘물꼬에선 요새’를 쉽니다 옥영경 2012-08-13 1221
3554 2012년 여름을 보내며 네게 옥영경 2012-09-04 981
3553 2012. 8.11.흙날. 갬 옥영경 2012-09-08 857
3552 2012. 8.12.해날. 길 것 같은 비 옥영경 2012-09-08 995
3551 2012. 8.13.달날. 비 옥영경 2012-09-08 982
» 2012. 8.14.불날. 흐리다 비 옥영경 2012-09-09 980
3549 2012. 8.15.물날. 멀리 번개. 밤비, 서울은 물에 잠겼다 하고 옥영경 2012-09-09 1031
3548 2012. 8.16.나무날. 장대비 내리다 갬 옥영경 2012-09-10 1072
3547 2012. 8.17.쇠날. 굵은 비 가다오다 옥영경 2012-09-10 1107
XE Login

OpenID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