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승에서도 자식 집을 먼저 지으러 아비는 일찍 세상을 떠났고,

아비 자리는 늘 여러 어르신이 대신했습니다.

오늘은 여든을 넘으신 노시인과 동행할 일이 있었습니다.

길 위에서 네비게이션이 망가졌고,

낯선 길에서 허둥대다가 멀지 않게 오고 있던 동행 차들을 만나

다행하였습니다.

어르신을 너무 고생시켰으나

당신은 우리를 때로 지적인 사유의 세계로 경험으로 온화함으로 인내함으로

그 시간을 다 스승으로 계셔주셨습니다.

지나쳐 멀리 간 길을 다시 돌아갈 때 당신 그러셨습니다.

“이 쪽도 왔으면 저 쪽도 보고, 좋지, 뭐.”

선생님은 그렇게 이즈음의 삶을 견뎌나가는 우리에게 위로이고 계셨습니다.

하여 잠시 이 시점의 삶의 무게를 내려놓을 수 있었습니다.

놓으면 그만 악어 우글거리는 천길 낭떠러지가 기다리기도 했는 양

내려놓지 못하던 것을,

그럴 빌미와 언덕이 돼주셨습니다.

평생 섬을 여행하고 다니며 자판기커피가 익어진 당신으로

오늘도 그 커피 한 잔 찾아 마셨기

훗날 오늘을 추억한다면 ‘자판기커피’로 기억하겠습니다.

그리고,

대해리의 물꼬는 고요한 하루였다 합니다.

 

아이는 외할아버지를 모시고 떠나는 여행 같다고 했습니다.

때로 삶이 고달프기로는 아이들이라고 그런 순간 없을까요.

요새 아이는 그런 삶을 건너가고 있었는데,

남의 집 처마기둥에 해먹을 달고 거기 누워 흔들거리며

한밤중 쏟아지는 빗속을 하염없이 바라보았습니다.

자신의 삶을 가지런히 놓아보고 있는 중일 테지요...

 

 

양평 고슬에서

 

 

그날 어르신이 잠든 서재를 열 수 없어서

초코파이 상자를 뜯어 뒤집어 쓴 글은 이러했다

 

늦은 밤

이생에서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에 동의한

여든 네 살 시인과

쉰일곱 명상가와

마흔 다섯 여자가 있었고,

곁에서 열다섯 사내아이는

고기를 먹는 지금이 자기에게 그렇다고 재청했다

자리를 털고 삶을 치우고 설거지를 하자

기다렸던 듯 비 내렸다,

억수비 내렸다

금세 처마에 잦아든 빗방울,

- 대성통곡 하더니 누가 달랬나 봐

말 떨어지기 무섭게 다시 세차진 비,

- 그러게 하늘이 하는 일에 뭐라 하면 안 된다니까

그러자 비 다시 그쳤다

한숨 돌린 비는

다시 굵어져 밤새 내렸고

 

귀에 넘친 빗소리로

물에 뜬 배처럼 바다를 출렁인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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