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은 아침에야 멎었다.

쌓인 눈이 장딴지에 이른다.

 

고추장 된장 막장 청국장 멸간장 다 됐고,

오가리들 다 됐고,

시래기 됐고(올해는 삶아 널어 말리는 과정을 밟지 않고 그냥 널어보았다),

무엇보다 김장 다 됐다.

일찌감치 연탄 들였고, 나무 쟁여두었고.

무엇이 더 필요하겠는가.

늦도록 구들더께마냥 뒹굴었다.

방은 따뜻했고, 난로 위 물은 펄펄 끓는다.

오늘은 미역국과 굴전을 밥상에 올렸다.

식구 하나 생일이기도 했다.

누군가 태어났고 살았고 그리고 우리 다 안다, 그가 죽을 날도 오리란 걸.

아주 오래 전 겨울 새벽 태어난 한 인간의 시작을 그려본다.

우리, 우리 생을 잘 건너고 있는가.

난 영웅이 아니다.

난 그게 옳은 일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 뿐. 그게 다다.

우리 모두 평범한 사람들이다.

평범한 비서 주부 청소년들이라 해도

각자의 길에서 작은 등불을 켤 수 있다.

캄캄한 밤이라 해도.

내 말 아니고 Miep Gies; 안네 가족을 도왔고 안네의 일기를 빛 보게 했던.

 

 

결국 길을 나서기로 한다,

아주 천천히 천천히.

“안되면 면소재지 가서 택배만 보내고 오자.”

꾸려놓은 택배를 언제 또 보낼 수 있으려나 싶어.

산마을을 내려가니 그럭저럭 한두 대씩 차가 보인다.

“황간 쪽으로 돌아서, 나선 김에 오늘 (읍내) 다녀와야겠다.”

읍내로 가는 지름길 고개를 두고 빙 돌아 간다.

도서관에 빌려온 책도 보내야 하고,

버스가 들어오지 않는데 읍내 볼일 있는 아이도 있었고,

팩스가 수명을 다해서 병원보내기 더는 미룰 수 없었고

(으윽. 그건 기사가 오는 거라데. 내일 방문키로. 그런데 오기 힘들겠지, 이 눈에?)

한동안 마을을 빠져 나가지 못할 시간들(당연히 얼어붙은 길 때문에)을 위해

마을 안에서 움직일 차의 기름도 넉넉히 채워두고.

아마도 이 눈이 얼면 한참 발이 묶이리라.

차라리 높기는 해도 지금 다녀오는 게 나을 테지.

정말 밤부터 떨어지는 기온.

얼마동안 마을을 나가기 어려울 것.

 

돌아오니 택배 하나가 맞는다.

멀리 부산에서 왔다.

언젠가 이곳 아이가 나오는 다큐멘터리를 보았고

그러다 물꼬를 알게 되고

그리고 품앗이일꾼이 되고 싶어했다.

아직 걸음은 않았으나 연락이 몇 차례 오갔다.

그리고 아이에게 이렇게 선물을 보내왔지.

책들,

애써서 골랐을 것을 충분히 짐작케 하는.

한 아이를 키우는 데 이렇게 많은 손발들이 닿는다.

나도 그대도 그렇게 살았을 것.

우리 생이 고맙다.

 

팩스는... 결국 방문수리 신청을 취소했다.

망가졌을 것이라 추정되는 부품이 없는 기종인데

어차피 다녀가면 출장비가 중고 팩스 하나 마련할 값이라

아이가 중고기기를 알아보기로 한다.

"혹 뉘 댁에 노는 팩스 없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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