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5.21.불날. 청명한 하늘

조회 수 869 추천 수 0 2013.05.27 00:20:22

 

소만(小滿),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오장육부도 그래야 보존이 되는 법,

많이 먹어서 배 터져 죽고 적게 먹어서 부황에 죽고,

이치에는 한치 어긋남이 없나니...’(박경리의 <토지>에서)

부황 떴던 바로 그 보릿고개.

이제야 만물이 생장하여 가득찬다(滿)?

이맘쯤 여름으로 문턱을 넘는다지만

산마을의 아침저녁은 바람 차기도 차고 쌀쌀도 하네요.

하여 소만 바람에 설늙은이 얼어 죽는다 하였던가요.

그래도 한낮은 여름.

닦아놓은 것 같은 저 하늘 쪽빛 좀 보아요.

어쩜 저런 하늘일 수 있을지요.

누가 저리 닦았더란 말입니까.

생전 본 적이 없는 쪽빛이 거기 청명하게 있었습니다.

산도 좋고 물도 좋아 빨래간 진주 며늘 아가처럼

볕도 도탑고 바람도 좋아 그렇게 빨래를 했네요.

아이들과 공부하는 가운데 짬짬이 나가서 커다란 고무통에 이불 넣고 밟기.

사내아이들 굵은 장단지가 어찌나 듬직도 하던지요.

지난주는 이른 아침이며 해거름이며 밭패고 순 놓고 밭매고,

이 주는 공부하는 사이사이

벽을 가득 메운 이불을 저들 다리 빌려 모다 빨아야지 하지요.

아이들은 해건지기(아침수행)로 국선도와 명상과 티벳식 절 대배 백배,

저녁수행으로 먹과 붓을 써서 하는 붓명상.

그러니까 이번에는 빨래수행까지!

도인들 났단 소식 들리걸랑 옌 줄 아시오라.

 

9학년 아이들과 영어 에포크;epoch(주기집중공부) 주간 사흘째.

아이들과 일찍 학교를 내려와 수행하고 특강 시작.

자기들도 안개 꼈던 길이 좀 밝아지니 재미들이 있어 합니다.

헤매던 길에서 길만 찾아도,

목적지까지 아직 멀었어도 눈이 밝아지지 않던가요.

걸음에 힘이 나고 마음이 좀 가뿐해지지 않더냐 말입니다.

그런데 한 번에 해내기는 좀 많은 양입니다.

하기야 중학 3년 영어 교육과정을 40시간 동안 훑겠다 했으니...

그래도 잘 따라오는 아이들이 기분을 참 좋게 합니다.

서로 힘이 나는 거지요.

자신이 못하는 게 별로 문제가 되지 않고

서슴없이 필요한 부분에서 선생을 부를 수 있는 분위기,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모르는 문제에서 앎으로 가는 시간들,

너도 좋고 나도 좋습니다.

덕분에 저도 공부 좀 하네요.

열정적인 공부, 그것의 유용성을 빼더라도,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재미가 있던가요.

진리를 탐구하는 그 재미가 우리를 감싸서 모두를 고무시키고 있는 지금!

 

낮밥 때는 잠시 면소재지 우체국에 다녀옵니다.

달골 뒤란 무너진 절개지는 계속 방치되어 있고,

지난 가으내 애를 먹이던 공사는 오도가도 못하는 길이 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입으로 계속 싸울 일이 아니다 싶어

문서를 작성하여 보냈지요.

 

종일 기척이 없는 사택 앞집 정성순 할머니댁,

저녁답에 들여다보니 종일 아무것도 드시지 못했다 합니다.

엊저녁 늦게 마당에서 다리에 힘이 없다고 주저앉은 것을 보고,

도저히 일으켜 세울 수가 없다고 소사아저씨 달려왔더랬지요.

아랫마을 조카네 전화 넣었더랬습니다.

술이 많이 취하셔서 그렇겠다 했는데,

아마도 다리를 영 쓰지 못하겠는 모양.

조카네도 저녁에 들여다본다고 왔더니

이불까지 적시고 종일 누우셨더라나요.

뭐라도 끓이겠다 하기

가까운 부엌 두고 뭐 그렇게까지 하냐며

얼른 가마솥방으로 달려가 된장죽을 끓였습니다.

내일 아침도 그러마 했지요.

이 적막한 곳에 당신마저 떠나면 얼마나 흐릴 것인지요.

마음 덜컹했습니다.

내일 아침 먹고 병원에들 가본다지요.

...

 

올 여름 계자 끝에 2박3일 중고생 일정이 잡힙니다.

물꼬가 진행하는 것은 아니고 한 신부님이 주관하시는데,

원래는 계자가 다음 계자로 건너가는 때에 오겠다 했지요.

계자와 계자 사이에 공간이야 일정이 돌아가지 않지만

도저히 그건 무리입니다.

사람 들어오고 나가는 자리가 어디 수월터냐 말입니다.

그래서 아니 되겠다 하니 일정을 바꾸어주셨지요.

우리야 그저 뒷배가 되어주면 될 일이라 오시라 합니다.

벌써 여름일정으로 후끈합니다, 여기.

 

강의 의뢰가 왔습니다.

재작년부터 서울 길이 잦습니다.

한국사회의 정신적 위기와 대응사례가 이제 정부에서도 큰 화두로 등장했나 봅니다.

결국 공동체에 대한 얘기를 해달란 건데

무슨 할 말이 있겠는지요.

실패한 공동체 이야기,

그래서 공동체 건설에 좋은 안내 역할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네요.

자유학교 물꼬'는 1990년대 말 서울이라는 대도시 한가운데서

세 해 동안 같이 일하는 젊은 사람들이 도시공동체를 실험한 적도 있고,

영동 산골에서 산골마을공동체('물꼬생태공동체')도 역시

실험의 과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산마을에서 나날을 뚜벅뚜벅 걸어갈 뿐인

작은 '아이들의 학교이자 어른들의 학교'이지요.

사실 실패한 공동체인 셈입니다,

물론 물꼬 스스로는 그것을 실패라 말하지 않고

그저 인류의 흥망성쇠처럼 자연스런 길이라 여기지만.

‘...성공한 공동체 사례를 찾으신다면 저희는 적합하지가 않겠습니다.

다만, 실패한 공동체로서 그 실패의 경험을 타산지석으로 삼으시라

왜 공동체였고, 어떻게 공동체를 꾸렸으며, 왜 실패했고,

그런데도 왜 여전히 공동체를 꿈꾸며 그런 속에 지금 물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런 이야기를 들려드릴 수는 있겠습니다.

물꼬는 여전히 공동체의 유효성을 믿으며

지치지 않고 공동체적 길을 모색하고 있으니까요.’

혹여 그런 이야기라도 필요하시다면 다시 연락 주십사 하였더랍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수sort
3104 2019. 3.24.해날. 맑음 옥영경 2019-04-04 871
3103 2015. 8.28.쇠날. 소나기 옥영경 2015-09-18 871
3102 160 계자 닫는 날, 2015. 8. 7.쇠날. 맑음 옥영경 2015-08-22 871
3101 2013. 4. 5.쇠날. 미세먼지로 뿌연 하늘 옥영경 2013-04-19 871
3100 2012. 8.28.불날. 태풍 옥영경 2012-09-11 871
3099 2010. 6.22.불날. 맑음 옥영경 2010-07-12 871
3098 2017.10.17.불날. 맑음 / 집짓기 현장 첫발 옥영경 2017-12-11 870
3097 2017. 9. 4~6.달~물날. 맑았다가 비 내리고, 사흗날 아침 비와 바람 옥영경 2017-10-14 870
3096 2017. 7.12~13.물~나무날. 습이 묻은 해 옥영경 2017-08-04 870
3095 2017. 2.10.쇠날 / 부디 읽어주시라, <거짓말이다> 옥영경 2017-02-20 870
3094 2016. 3. 4~5.쇠~흙날. 비, 비, 비, 그리고 창대비 / 4번과 16번 옥영경 2016-03-23 870
3093 2015. 7.29.물날. 소나기, 그리고 폭염 옥영경 2015-08-05 870
3092 2014.10.19.해날. 맑음 옥영경 2014-10-31 870
3091 5월 빈들 여는 날, 2013. 5.24.쇠날. 맑음 옥영경 2013-06-10 870
» 2013. 5.21.불날. 청명한 하늘 옥영경 2013-05-27 869
3089 2011. 2.20.해날. 맑음 옥영경 2011-03-07 870
3088 2009.12. 5.흙날. 눈 옥영경 2009-12-20 870
3087 2019. 3.25.달날. 맑음 옥영경 2019-04-04 869
3086 2017.12.19.불날. 아침 눈, 그리고 볕 옥영경 2018-01-17 869
3085 2017. 3.16~17.나무~쇠날. 맑음 / 기억 옥영경 2017-04-19 869
XE Login

OpenID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