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가평 설악의 새 단장 건축현장에 나무다루기를 하러 온지 아흐레째.
대해리도 어제부터 비 내리고 있다 합니다.
오전에 비 잦아들고 흐린 속에 바람 조금씩 일었고,
무를 좀 솎아주었다고.
오늘은 현장을 떠나기로 한 데다 비까지 추적거리고,
또 선배들이 모여 공장 전체에 대해 머리 맞댈 일도 있어
이러저러 오전은 전체 작업을 진행키 어려워 개인 작업.
아직 계단은 층계참만 만들어진 채 중단돼 있습니다.
만들던 원형스툴을 마저 완성합니다.
뭘 모르면 무식하고는 하지요.
샌딩기가 없어 그라인더로 사포질.
알고 보니 그거 무지 무서운 짓이라고.
그라인더는 쇠를 자르는 데 주로 쓴다나요,
위험하기도 위험하고.
으윽.
한때 이 땅에서 영혼을 살찌우려는 이들에게 훌륭한 안내자 역할을 했던
한 출판사를 경영하던 선배와,
그림에서부터 도예, 장승 만들기, 퍼포먼스 들을 하며
한 인간이 얼마나 종합예술적일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선배 부부가 합류해
새 단장을 하는 건축현장이 전체그림이야기로 활기를 띤 오후.
물에 가서 수상스키 타고
덕분에 공구를 내려놓고 한가로웠던 시간이었습니다.
산악차를 타고 안개비와 는개비 오가는 일대 산을 돌기도 하고
홍천강에 가 수상스키도 탑니다.
“잘 타네. 수상스키는 또 언제 타봤냐?”
“내가 그랬지? 잘 하지는 못해도 다 '할 줄'은 안다고!”
그러게요.
참 많은 경험들을 하고 살았구나 싶데요.
수상스키, 꼭 이십년도 더 전에 워커힐 아래 한강에서
같이 한국정서교육개발원의 글쓰기 관련 교재를 집필했던 남자 선배 교사가
당신 타러 다니며 몇 차례 태워주었더랬습니다.
몸은 참 신기하기도 하지요,
그 오래 전을 기억하다니.
“봐, 오니까 이런 것도 태워주고. 여기(공사현장) 좋지?”
시화전을 준비하는 이들로부터 원고 청탁이 어제 있었고,
인문학운동 실천사례를 들려달라는 강연요청이 있었습니다.
몇 발표자 중에 한 사람으로
토론자로 참석할 것인가 발표자로 참석할 것인가는
이쪽 판단에 맡기겠다 공을 주네요.
말미를 좀 달라, 내일 밤까지 답한다 하였습니다.
나무 앞에 자주 서있습니다.
언제나 거기 있었던 것인데 그 앞에 선 게 ‘요새’입니다.
나이테는 시간에 따라 안에서 밖으로 자리잡아갑니다,
나이든 것은 안으로, 새로 태어나는 것은 바깥에.
늙은 목질은 조금씩 말라가고 그렇게 죽어갑니다.
‘나무의 중심부는 아무런 하는 일이 없는 무위의 세월을 수천 년씩 이어가는데,
그 굳어버린 무위의 단단함으로
나무라는 생명체를 땅 위에 곧게 서서 살아갈 수 있게 해준다’,
고 수목생리학에서는 말한다지요.
나무는 그 나무 한 그루 안에서 삶과 죽음을 동시에 확장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몸은, 우리가 살아 움직이고 있는 이 인간의 몸은
정녕 삶의 확장만 있는지.
그렇지도 않지요, 손톱이며 피부비늘이며...
다만 나무는 안으로 밀리는 죽음이 인간은 밖으로 밀리는 것이리니.
그게 또 나무와 사람의 차이이겄다 싶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