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돋이를 위해 뒤척이고 있는, 검은 산 실루엣 위의 하늘.

시작이 주는 경건함이 거기 있다.

이때의 산 형상이 가장 뚜렷한 어둠.

이른 아침이다.

간밤은 늦었다.

관계가 가까워지면 기대하게 되고 그것이 지옥을 만든다.

굳이 연애가 아니어도 그 처음에 있었을 사람 사이의 설렘을 되짚어보다가

그 흔한 ‘그거 다 욕심이야’라는 말을 새삼스럽게 생각했다.

가까운 벗을 보내고 기운 다 빠져 있는 동안

정작 살아있는, 곁에 있는 사람들은 여전히 살고 나 역시 여전히 살아 움직이는데,

그걸 또 잊었던 갑다.

모다 안녕하신가.


오전에는 어제 측량한 곳 말목을 돌아보다.

그 곁으로 다시 긴 쇠말뚝을 박다,

곧 굴삭기 작업을 하려면 붙어 있는 땅과 문제가 되지 않도록.

여전히 풀 무성한 묵정밭이나 어제 작업한 걸음이 그나마 길이 되더라.

밤에는 주말에 있을 모임에 쓸 수육용 배추김치를 담다. 자정에야.


랩탑에 문제가 생기고 11학년 아이 것을 임시로 쓰다.

한글문서를 열다가 아이가 이전에 쓰던 ‘새우리말사전’을 보게 되다.

이 산마을에서 9학년까지 학교를 가지 않았던 아이가 하던 놀이 가운데 하나.

자신에게 의미가 있는 낱말을 정의해나가던 것인데,

그 나이의 그의 생활과 중요했던 것들을 되짚어보게 되다.

우리는 많은 시간을 함께 했더랬다. 학교를 다니지 않았으니까.

주로 초등 고학년에 썼던 것들. 그 즈음의 그의 생활을 보다. 그건 내가 보낸 시간이기도 한.

끝에 두어 줄 읽다가 재밌어서 아침 시간을 다 보냈네.


희망이란, 우리나라가 월드컵에서 피파랭킹 49위이고, 이때까지 원정 16강에 올라간 적이 없다 하여도 올라가도록 응원하는 것.


해방이란, 말 안 듣는 애랑 놀아주다가 그 애가 그만 놀자고 했을 때의 행복감.

해방이란, 엄마한테 잔소리를 듣다가 엄마가“그만하자” 고 했을 때 어깨의 긴장이 풀어지는 것.


행복이란, 하루 종일 시내에 있어서 힘이 들 때 엄마가 사준 치킨 볼 하나를 먹고 느끼는 감동.

행복이란, 자원봉사로 어떤 할머니 집을 청소해 드리고 나서 할머니가 웃으시면서 “아이고, 정말 고마워.” 라고 하실 때 느끼는 보람.

행복이란, 추운 겨울에 난로 앞에 앉아있을 때 몸이 따스해 지는 기분.

행복이란, 엄마 아빠와 함께 잘 때 느끼는 것.


평화란, 내가 한발자국 물러나 주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 “쟤가 잘못을 했지만 봐주자.”


책임이란, 내 밭에 물줄 일을 남한테 미루지 않는 것.

책임이란, 도서관에서 빌린 책에 흠집을 내지 않고 보는 것. 원래상태로 반납하는 것.

책임이란, 전날 저녁에 미리 모든 준비물을 챙겨놓는 것.


재미란, 내가 생 은행을 죽도록 까서 그것을 엄마한테 비싸게 팔았을 때 수지맞은 것.


자유란, 내가 남한테 기대지 않고 떳떳하고, 당당할 때 느끼는 것.


인내란, 동생이 구구단을 외우지 못해서 답답하더라도 짜증을 내지 않고, 충분히 기다려 주는 것. 동생도 외우고 싶은 마음은 간절할 테니까…….


이해란, 강아지가 나랑 놀고 싶은지, 밥을 먹고 싶은지 살피는 것.

이해란, 토끼를 키우게 됐을 때 ‘토끼 창살이 작지 않을까?’, ‘잘 적응을 하나’ 살펴주는 것.


의지란, 단식을 하면서 “배가 고파도, 속이 쓰려도 반드시 단식을 해내야지” 라는 다짐.

의지란, 엄마가 10년 전 학교를 세우겠다고 했을 때 모든 사람들이 말도 안 된다 그랬지만, 결국 해내게 한 힘.


용기란, 어두운 복도를 지나가 보는 것. 두려운 생각을 떨쳐내는 것.

용기란, 나는 축구를 못하고, 할 줄 모르지만 한번 시도 해 보는 것.


양심이란, 친구가 공을 들여서 해놓은 것을 모방하지 않는 것. 친구 숙제를 베끼지 않는 것.

양심이란, 내 안에 들어있는 착한 마음씨, 나를 올바르게 키워주는 것.

양심이란, 슈퍼에서 거스름돈을 더 많이 받았을 때 “거스름돈을 잘못 주셨어요.” 하고 말씀드리는 것.

양심이란, 사탕껍질을 아무데나 버리지 않고, 주머니에 넣어두는 것.

양심이란, 어머니, 아버지께 부탁을 하지 않는 것. 동생에게 심부름을 시키지 않는 것.

양심이란, 누군가가 선물을 사준다고 했을 때 조그마한 물건을 부탁하는 것.


약속이란, 도서관에 책을 반납하기로 한 날짜에 책을 반드시 반납하는 것.


싫음이란, 콩을 밥에서 빼놓고 싶은 것.


사랑이란, 밤이 되어도 안 오시는 엄마를 걱정하는 마음.


보람이란, 정성껏 키운 해바라기에 씨가 맺혔을 때 느끼는 뿌듯하고 즐거운 감정.


배려란, 엄마 컴퓨터를 쓰기 전에 “엄마, 엄마 컴퓨터 써도 되나요?”하고 물어주는 것.

배려란, 감기 걸린 친구가 누워있을 때 조심조심 걷는 것.


믿음이란, 엄마가 나를 학교에 안 보내도 불안해하지 않는 것. 엄마가 생각이 있어 그러는 거라고, 엄마가 나를 좋지 않은 길로 보내지 않을 거라고 믿는 것


마음나누기란, 콩을 수확할 때 산짐승들이 먹을 것도 남겨놓는 것.


도움이란, 친구의 모래성을 더욱 멋지게 만들기 위해 내 모든 기술을 다하는 것.

도움이란, 어머니가 바쁘실 때는 내가 밥을 하고, 내가 설거지를 하고, 내가 빨래를 하고, 내가 강아지 밥을 주는 것.

도움이란, 청소를 하기 힘드신 동네 할머니 집을 행복하고 좋은 마음으로 청소해 드리는 것.


노력이란, 영어를 하려고 해도 영어를 배워야 하듯 우리가 하고 있는 모든 움직임, 생각, 활동을 위해서 꼭 거쳐야 하는 것.


공부란, 만주도 우리 선조들의 땅이었고, 중국도 우리 선조들의 땅이었다는 사실을 전수받는 것.


기적이란, 애들과 놀다가 유리창을 깨 다리의 반이 잘렸지만, 급소를 아슬아슬하게 피하고 살아남은 것.


관용이란, 나랑 다른 피부색, 문화를 갖고 있어도, 그것을 존중해 주는 것. ‘일본 사람들은 밥그릇을 들고 먹는구나.’

관용이란, 내가 1시간동안 쌓은 모래성을 친구가 실수로 무너뜨렸을 때 “다시 지으면 되”하고 쿨 하게 말하는 것.


감사란, 산에 가는 날 엄마가 일찍 일어나서 김밥을 싸 주실 때 느끼는 고마운 감정.


아이가 엄마의 단식을 따라 단식(그것도 이레가 아니라 사흘)을 하고

배가 너무 고파서 울었다던 그 이야기를 오마이뉴스에 썼을 때

여러 어른들이 맛있는 것 사 먹으라며 보냈던 좋은기사원고료,

그가 댓 줄 가꾸던 밭,

그가 까주던 은행,

그가 이 산마을에서 마을 할머니 댁에 놀러다니며 일손을 거들던 시간,

학교를 가지 않는 시간 그의 놀이터였고 공부터였던 도서관,

우리를 둘러싸고 있던 물꼬라는 공간에서 하는 이야기도 담겼고,

그 나이 때의 그의 불안들도 헤아려졌다.

늦은 밤 아직 오지 않은 엄마를 걱정하며 아이는 전화를 걸어오고는 하였다.

외로웠을 그의 시간들이 짠했고, 한편 기특했다.

그런데, 걔는 콩이 참말 그리 싫은가...


바깥 수업과 상담을 다녀와 그림 두 점 완성.

숲을 그리고 마당을 그리고, 돌계단을 그리고 바위를 그렸다.

오래 그렸다.

그림이 재능이라고만 생각했더랬다.

그림에 젬병. 그것만일까만.

그런데, 그림이 전적으로 재능이라고만 알고 있던 내게

결코 그렇지 않다고 말해준 화가가 있었다,

누구나 즐길 수 있지만 그래도 일정 정도의 재능이 담지 되어야 한다고 믿던 내게.

나아가 물꼬에서 오랜 시간해온 아이들의 ‘손풀기’ 작업이,

눈에 보는 대로, 그리고 크게 그리던 그 그림 안내가

아이들 뿐 아니라 내게도 왔다.

그리고 그렸다.

그럴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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