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0.14.물날. 날 좋다

조회 수 739 추천 수 0 2015.11.06 16:56:29


학교아저씨는 은행나무 가지들을 잘라주고 있다.

위탁교육 중.

아침, 아이들은 실컷 잤다.

계자에서 하루쯤 ‘구들더께’ 시간으로 낮잠을 자거나 뒹굴며

불편한 이 산골 삶의 고단함을 덜고 가듯

오늘쯤의 아침에 그런 시간이 필요했다.

느지막히 해건지기를 하고.

교무실에서, 혹은 마당에서 구성원들이 모다 제 자리에서 집안일을 좀 했다.

점심을 먹고, 밥상머리무대에서 등에 앉는 볕을 업고 책을 읽고 옥수수를 까고.

아이들이 설거지를 하는 동안 나 역시 책을 보기도 했다.

아이들이 있으니 바쁠 것 같지만, 같이 사는 삶은 그렇게 여유를 주기도 한다.


다례회가 있었다.

다식을 준비했고,

한국차로는 녹차, 중국차로는 보이차를 마셨다.

말만이 위로이겠느냐, 오늘은 차가 그러했다.

말만이 대화이겠느냐, 오늘은 차를 달이고 내는 시간이 그러했다.

같이 앉아준 어른들의 눈길이, 따스한 숨결이 또한 모다 우리 아이들 삶에 기운이었으리.


“시간이 너무 빨리 가요.”

모두 안정적인.

가족 같다는 보육원 아이 말에 눈물이 핑 돌았다.

그래, 가족, 그 따스하고 든든한 낱말...

아끼고 마음을 살펴주고 집안일을 함께 하고 걱정하고.

이렇게 사는 일이 좋다, 참 좋다.

정작 아이들보다 내가 더 위로이고 치료이고 치유인 시간.


내일에 대한 기대로 모두 들떴다.

‘안하는 날’이다.

뭘 안 하니까 뭘 할 수 있고, 그것도 많이 할 수 있는.

그래서 어쩌면 결국 많이 하는 날이 될 수도 있을!


<미안해, 스이카>(하야시 미키/다산책방, 2008)

아이들 덕분에 읽었다. 문장이나 깊이가 문제가 아닌 책.

스이카는 왕따를 당하는 친구 치카를 옹호한 일로 왕따를 당한다.

그래도 꿋꿋이,

지금 놔버리면 영영 옛날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아 두려워

힘겹게 교실 문을 열고 떨어지지 않는 입으로 아침 인사를 한다.

그러도록 스이카를 단단하게 키워준 부모님이 고마웠다.

그런 속에 학교 밖에서 만난 유리에를 통해 오랜만에 깊은 만족감을 얻기도.

우리를 그렇게 살라고 하는 사람, 살라고 하는 일이 있다.

유리에가 말했다, “힘 내!”

‘힘내라는 말이 마음이 외로운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약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아이들의 폭력 수위는 점점 높아지고 교사조차 외면할 때,

아, 나는 자신에게 물었다, 나는 어떤 교사인가 하고.

하기야 교사 역시 그런 상황에서 무슨 일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당하고, 맞고, ‘마음속에는 증오와 적개심만 가득하고’,

‘게다가 나도 모르게 비굴하게 행동하기 시작했다.’.

스이카는 그렇게 마음이 문드러져가고, 결국 창밖으로 발을 내밀고 만다.

그제야 치카가 분연히 일어나 왕따를 고발하고,

치카는 다시 표적이 된다. 그러나 더는 벌벌 떨지 않는다.

당당함으로 견딜 수 있는 시간이었으리.

“너 때문에 견딜 수 있었어, 난 네가 필요해.”

치카의 외침에 의식불명인 스이카의 응어리가 비로소 풀리지만,

너무 멀리 가서 이 세상으로 돌아올 길은 이미 사라졌다.

‘나는 아무 짓도 안했어, 그냥 보기만 했으니 괜찮아,

스스로를 위로 했는데 그게 얼마나 잔인한 짓이었는지,

괴롭히는 사람이나 그걸 보고 있는 사람이나 사실은 모두 똑같았던 거다.’

자잘한 일상만 그러하겠는가.

우리가 세월호를 저버릴 수 없는 까닭도 그러하지 않겠는가.

사실은 그 배에 우리 모두 타고 있었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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