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 밝은! 보름 사흘 지났으나 산마을 훤한.

 

겨울 계자를 위해 이불을 좀 장만했고,

인근 도시로 오늘 가지러 다녀오다.

논두렁인 어르신 한 분이 대구에서 봐온 장이었다.

얼마나 많은 손으로 이 살림이 건사되는가.

간 걸음에 부엌의 망가질 위기에 있는 화덕 불판도 구해오고,

옷감들 가장자리에 쓸 바이어스 테이프도 사오고,

필요한 문구류도 좀 들이고,

다시 읍내로 가서 프린트 잉크를 챙기고 도서관도 들리고.

(프린터가 아주 소모품이더라. 그리 만든다고. 전 지구적으로 얼마나 낭비더냐.

 어디 이것만 그리할까. 10년마다 바꾼다는 가전제품들, 폐기된 것들은 다 어디로 가는가.)

그리고, 요새 한참 유행한다는 석고방향제 두어 개 만들어 가마솥방에 걸다.

 

오랜 겨울비로 질퍽거리던 운동장이 이제야 땅땅.

얼었으니까.

꺼진 곳들에 연탄재를 깔고 있다.

엊그제는 옥상에서 마른 낙엽들도 긁어내렸네.

날 푹해 미루고 있던 본관 남쪽 창문 비닐도 지난주에는 달았다.

된장집 마당 마른풀도 이 겨울에 이르러서야 정리했네.

그리고 연일 땔감을 자르고 쌓는 중.

계자 준비들이다.

 

물꼬의 논두렁이기도 한 가까운 도시의 선배가 건너왔다.

겨울이면 보급대처럼 먹을 걸 넣어주고는 한다.

하기야 꼭 겨울만 그런 것도 아니지.

최근 좀 앓았더니 몸보신이 필요한 때라고 산골에서 귀한 먹을거리들 실어오셨다.

30년을 한결같이 누군가에게 쏟는 정성이라니.

내 생애 당신 계셨구나, 위로와 위안과 감사와...

그 옛적 눈 오던 밤, 빈민활동을 들어가 있던 시흥동 골짝까지

눈길을 헤치고 먹을 걸 사서 날라주던, 아버지 같던 당신을 생각했다.

형 쓰러지면 내가 수발들고 가리, 싶더라.

“너는 어쩜 늘 그리 설거지를 즐겁게 하냐?.”

그랬구나, 쉬운 일이니까, 좋은 사람들을 위해서이니, 노래가 절로 날,

그런데, 꽤 여러 달을 나 그러지 못했음을 알아차렸네.

어떤 이를 위해선 이리 즐거움이고 어떤 이에겐 그렇지 못하였고나.

음...

흔들리는 시간에 우리 곁에 그렇게 사람들이 있으리, 우리 다만 잊고 있을 뿐.

아시는가, 그대 뒤에 나 있네.

 

자정이 넘어 낸시 마이어스 감독의 <인턴>(2015) 보다.

늘 영화를 공급해주는 선배.

가을학기엔 다른 것에 집중해있느라, 그리고 선배도 바빠져

보는 일도, 그래서 영화를 볼 일도 드물었네.

영화평을 썼던 어느 때를 지나, 또 도시를 떠나면서

거의 유일한 아쉬움은 먼 극장이지 않았나싶은.

낸시 마이어스의 다른 영화들처럼 편했고, 한편 불편했다.

성장 영화라기보다 그저 좋은 배우가 보내준 따스한 이야기 정도?

의류쇼핑몰의 경영자로 창업 1년 반 만에 큰 규모로 성장시킨 이(앤 해서웨이)가

성공한 사업가로 날로 번창하는 사업에 매진하는 사이 그의 삶에 나버린 구멍을

노년의 인턴(아, 로버트 드니로이다!)이 메우고 채우고 쓰다듬어준다.

결론이 빤한데 보게 하는 힘이 있으니 감독의 힘일 테고, 또 배우의 힘일 테지.

큰 사건 없이 잔잔하게 말하듯 이어가는 결이 좋았네.

그가 흔들릴 때 조용히 다가가 손을 잡아주기,

그가 울 때 가만히 손수건을 내밀기,

그의 편 되기,

그런 것들을 생각했다.

앞에서 말한 불편이라 함은 전업주부에 대한 부정적 시선,

또 전업주부 역할을 맡은 남편의 삶을 너무 단선적으로 뭉뚱그려버린 불성실?

 

너는 나를 보는데 나는 다른 곳을 보거나,

이제 나는 너를 보는데 너는 다른 곳을 보거나.

그래서 그토록 많은 사랑이 비껴가는 것일 테고.

사람 관계의 쓸쓸함이 헤아려져 적적도 하더라.

하여 미룬 글쓰기로 날밤을 고스란히 밝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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