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3.23.물날. 맑음

조회 수 704 추천 수 0 2016.04.08 02:13:23


이번학기 물날 첫 바깥수업이 있었다.

다시 어른들을 만나고, 아이들을 만나고,

산마을에서 나가지 않을 때도 세상은 여전했다.

바느질 하는 사람들도 보다.

조각들을 이어 붙여 이불 앞판을 만들어놓고 뒤판을 위해 천을 부탁해놓았더랬다.

수행모임 사람들도 보다.

여전히 사람들은 모여 명상하고 있었다.

한 분이 선물로 주신 책 한 권.

고맙다. 내가 가꾸는 평화 말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하는 기도,

그런 마음이야말로 수행하는 마음 아니겠는가 싶더라.


책도 그렇지만 영화도 그렇다.

한 책이 나이에 따라 달리 읽히기도 하고,

전혀 다른 책이 나이에 따라 다른 강도로 새겨지기도 한다.

젊은 날의 내 영화로 꼽으라면

뜻밖에도 감독도 제목도 기억나지 않는 장면으로 남은 영화.

찾을라면 찾을 수도 있겠지만 굳이 그러고 싶은 것까지는 아닌.

헐리우드에서 만들어졌음직한 냉전시대를 담은 영화인데

시베리아 벌판 한 가운데 수용소가 있고, 그 둘레는 끝도 없이 처진 철조망,

거기 미국의 첩보원이 잡혀있다.

그들은 언젠가 탈출할 기회를 위해 날마다 뜀박질을 하고 또 하고 또 한다.

그리고 탈출을 했겠지.

그들이 뛰는 장면은

처지는 날이면 부르는 ‘정글숲을 지나서 가자’던 동요처럼

바닥에 떨어진 마음을 끌어올려주고는 했다.

무기력과 우울에서 내 손을 잡고 일으켜 다시 걷게 했다.

물꼬를 안내하는 글에 실린 ‘뚜벅뚜벅’ 걷는다는 말은

한 발 한 발 달리고 또 달리는 그 장면이었을 게다.

‘현재에도 여전히 길을 찾아 두리번거리지요.

아닌 줄 알지만 책무와 당위로만 가는 길이 되지 않도록

날이 더워져도 벗지 못하는 외투가 되지 않도록

뚜벅뚜벅 걸어왔던 지난 시간처럼

잘 맞는 옷을 입고 자신의 길을 향해 그리 또 발걸음을 떼려 합니다.’

그것은 <자본론>의 서문에서 맑스가 썼던

‘너 자신의 길을 가라, 누가 뭐라든’이란 문장의 다른 이름이기도 했을.


이즈음의 나이에 자꾸 곱씹어지는 영화는 한국영화 하나.

뭐 굳이 제목을 말하기까지야.

요양원에서 만난 간경병 남자와 40%의 폐만 남은 여자가

너 없으면 못 살 것 같이 행복하더니

남자는 여자의 도움으로 병을 회복한 뒤

지루해진 생활을 뒤로 하고 다시 환락가로 돌아간다.

아, 그게 사람이다.

지옥인 줄 알고도 걸어 들어가는.

안 좋은 줄 알고도 먹고, 그래선 안 되는 줄 알면서도 하고.

인간이란 존재에 대해 생각을 던져주는.

어쩌면 평이한 그 영화가 이렇게 강한 것도 나이 때문이거나.

사람이란 게 무엇이더냐....

그런데 말이다, 그게 죽음의 길인 줄 영화를 보는, 혹은 그가 아닌 타인들은 알지만

그러니까 죽음의 길이었지만

그리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 삶의 길이었으리라, 그에겐.

종국에는 죽음으로 가게 되지만(그랬나...)

그렇게 삶의 길과 죽음의 길이 같이 만들어낸 줄 위에 우리 있는 것 아닌가 싶은.

정녕 사람이 무엇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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