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없는 날.
학교에서는 긁은 낙엽들을 태우고 잔가지도 태우고.
교정지를 들여다보는 종일.
그리 말해도 반나절은 졸다가
반나절은 뭔가 보이는 일에 손을 뻗었다가
밤이 되어서야...
역시 시간도 시간이지만 밀도의 문제인.
특히 글 일은 그렇더라.
오늘 마무리해야 내일 아침 보내는데.
결국 내일 남도의 한 섬에 가야 하는 일정에까지 들고 가게 생겼네.
그냥 편히 마음 접다.
먼 길 잠이라도 좀 자고 나서야 할 텐데.
내일 하루를 교정에 더 써야겠을세.
교정지를 보며 썼던 글로 다시 고이는 생각들.
예컨대 아래의 문단들 앞에 섰을 때.
그래서 자꾸 더뎌지는 일이라.
나는 아줌마다. ‘아줌마’라는 낱말은 결혼했으나 아직 늙지 않은 여
성들을 두루 부를 수 있는 말이지만 그 대상을 주로 중년으로 한다.
남녀 성별 대결이 짙어가는 지금(사실 그것이 시대의 어려움으로 일어난 자연
스런 현상인지, 아니면 그것을 업고 이득을 취하는 이들의 획책인지는 모르
겠다)은 여론에서 좀 잦아든 집단이지만 한때 한국에서 아줌마는
‘제3의 성(性)’으로 불리고는 했다. 몰상식하거나 부끄러움을 모르
거나 시끄럽다는 의미쯤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그렇게 되었던
걸까. 비슷한 세월을 겪어온 이들이 갖는 연대감, 이제 어깨에서
부터 무릎까지 관절 이상을 겪는 사람의 고단함, 손으로 밥을 해
먹는 사람이 갖는 자신감, 자신의 울타리로 자식을 건사해본 사람
의 방어력으로부터 생겨난 것은 아닐까. 그렇게 보면 아름다운 이
름자다, 아줌마라는 건.
‘그’를 생각한다. 어긋지기 시작하던 때를 되짚어본다. 오해를
시작한 마음 앞에선 어떤 진실도 무력하다. 아니면 내가 정말 좋
은 사람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나쁜 사람이라고 나
는 인정할 수 없다. 내 어떤 부분이 좋은 사람이지 못할 수는 있어
도 어느 누구도 나쁜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이 편하기
위해 내가 나쁜 사람이어야 한다면 그러기로 한다. 혹 그가 내게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고 모두에게 그가 그런 것 또한 아니다. 우
리의 어떤 면이 부딪혔고, 그게 서로의 존재를 건드렸거나 아니면
그럴 정도가 아니었는데도 지혜가 모자라 그리되었거나. 나도 억
울하고 그도 나만큼 억울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다른 곳에
서 다르게 만났더라면 달랐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
쯤에서 우리는 갈등을 빚었나니, 더는 길이 없다면 헤어지는 것
도 방법이다. 그건 죽자는 말과는 다른 말이다. 사람은 결국 살자
고 헤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배웠겠지, 사람에 대
해 더 넓게, 자신에 대해서 더 깊이.
그에게 가 닿아 있던 팽팽한 끈을 끊는다. 그 순간 그도 떨어져
나가지만 나도 뒤도 벌러덩 엉덩방아를 찧는다. 그 정도는 감수
해야 비로소 끊을 수 있다. 상처 없이 어떻게 사람을 놓을 수 있단
말인가. 상처는 필연이다. 하지만 그것은 종국에는 아물고 만다.
그래서 모든 이의 마음에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았던’ 것이다. 그
리하여 우리 모두는 긴 세월 뒤 적의 없이 다시 만날 수 있는 것이
다. 괜찮다, 괜찮다, 다 괜찮다.
그립겠지. 그리울 것이다. 그리움이 어디 연인과의 일이기만 한
가. 연인이 아니라고 해서 그립지 못할 게 무언가.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자살조차도, 얼마나 설득력이 있는 얘
기일지 모르겠지만, 어쩌면 자신을 살리기 위한 길이었을 거라는,
살다 살다 도무지 안 되니 살려고 애쓴 길이 그 길이었을 거라는.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는 다 살자고 하는 짓이다. 어떤 생명이 죽
고자 하겠냐 말이다.
사랑은 아프거나 기쁘거나 아니면 건조하거나.
고마움을 잊지 않으면 안 좋을 게 없다. 어디 사랑만 그럴까.
내가 아는 것은 아직 내가 사랑하고 그리워한다는 것. 다음 일
은 다음 걸음에. 다만 나는 오래 사랑할 것이고 그리워할 것이다.
영화 <봄날은 간다>가 있었다. 사랑을 믿지 않는 여자와 사랑을
믿는 남자의 사랑 이야기쯤이라 할. 믿든 믿지 않든 사랑은 ‘사실’
이었고, 사랑은 유구히 남는다. 사람이 지옥을 지나갈 수 있게 하
는 것도 결국 사랑 아니던가. 사랑만 제대로 해낼 수 있다면!
모든 갈등은 내가 서툴기 때문이었다, 사랑에. 사랑을 제대로
하면 이별도 제대로 한다. 문제는 이별이 아니고 그것으로부터 무
엇을 얻었느냐가 아닐지. 산을 거뜬히 넘어낸 이는 다음 산 앞에
설 용기와 체력이 생기고, 산을 넘은 경험과 이해로 다음 산을 오
를 수 있으며 나아가 다음을 더욱 의미 있고 가치 있게 계획할 수
있다. 사랑엔들 다를까.
이제 내 가까이 ‘그’는 없다. 그러나 그의 존재로 나는 든든하
다. 사람의 존재는 그렇다. 심지어 세상을 떠나고도 여전히 내 곁
에 있기도 하다. 아버지만 해도 그렇다. 내 살 집 지으러 저 세상
에 먼저 갔다는 생각이 들고는 한다. 슬프기보다 당신 없는 세월
이 다만 쓸쓸한.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Carlos Ruis Zafon)의 소설에서 읽었을 것
이다. 세월이 가면 때때로 중요한 건 무엇을 주느냐가 아니라 무
엇을 양보하느냐라는 걸 알게 된다던가. ‘그’에게 주는 게 다라고
생각했던 건지 모르겠다. 다시 만나는 ‘그’에게 어쩌면 나는 양보
가 가능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