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에세이 내용은 의예과 M2 'Critical thinking' 과목의 과제물이며, 해당 과목의 형식과 조건, 평가 기준에 따라 작성되었음을 알립니다.
“독자들은 잠깐 내 입장이 되어보고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거야. ‘그런 처지가 되면 이런 기분이구나...... 조만간 나도 저런 입장이 되겠지’” (ebook P.68)
인간이 온전히 다른 존재에게 감정이입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소설의 몇 구절, 다큐멘터리, 감동스러운 영화에서 잠시 심금의 울림을 느끼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머리를 써서 공감할 뿐, 가슴으로 타인의 삶을 느끼는 것은 노력을 요한다. 그런데 <숨결이 바람 될 때>는 조금 달랐다. 내가 책장을 넘기는 그 순간순간이 내 이야기인가 싶었고, 잠시 내게도 암이 생기고 죽어가는 것처럼 느꼈다.
왜 그랬을까? 저자처럼 작은 마을과 자연에서 보냈던 어린 시간들 때문일까. 10대, 20대 때 읽은 책들과 그에 대한 느낌들 때문일까. 아일랜드 3대 문학가의 자취를 찾기 위해 아일랜드로 떠났던 내게,사뮈엘 베게트의 구절들이 반가웠기 때문일까. 지난 몇 년 간의 혼란스러운 시간들을 버틴 친구가 되었던 카프카, 카뮈, 소로에 대한 의견과 사유를 듣는 것 때문이었을까. 어쩌면 동시대에 살았다면, 내가 그와 같은 의대 동기였다면, 정말 우린 좋은 친구가 되었을 수도 있겠다.
물론, 의사라는 것만으로도 그에게 충분한 공감이 되었을 테지만, 무엇보다도 그가 의학에 발을 디딘 이유가 나와 유사하기도 했다. 철학과 문학, 심리학에서 유물론적 사고방식을 거치며 의학으로 인간의 뇌를 연구하고 싶다는 열정으로 의대에 들어왔는데, 폴은 ‘유기체들이 세상에서 의미를 찾는 데 뇌가 하는 역할을 알기 위해 신경과학을 공부’하게 되었다고 하니. 묘한 우연이다. 이런 연유로 작가가 던지는 질문들과 생각들을 함께 나누면서 책 속의 그와 함께 사유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죽음은 우리 모두에게 찾아온다. 우리 의사에게도 환자에게도. 살고, 숨 쉬고, 대사 작용을 하는 유기체로서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을 향해 속수무책으로 살아간다. ...(중략)... 우리 환자의 삶과 정체성은 우리 손에 달렸을지 몰라도, 늘 승리하는 건 죽음이다.”(ebook P.55)
언제인지 모르지만, 죽음은 반드시 우리에게 온다. 그 잔인한 죽음은 역설적이게도 우리 삶을 고찰하게 하고 충실하게 한다. 죽음을 중심으로 삶을 고찰하는 많은 책들이 존재하는 연유도 그 이유일 것이다. 대표적으로 루게릭병으로 시한부 판정을 받은 노은사를 매주 찾아가는 내용을 담은 미치 엘봄의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이 있다. 스승인 모리가 죽음을 앞두고 삶에 대해 내리는 결론 또한 이 책처럼 보편적인, 그러나 핵심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데, 사랑과 연대, 문학과 일, 목적성 등에 관한 것이었다.
작가 유시민이 자신의 정치 생활을 정리하며 썼던 <어떻게 살 것인가>또한 죽음에 관한 상당히 의미 있는 고찰을 담고 있다. 첫 번째 챕터의 소단원은 ‘왜 자살하지 않느냐’이고 두 번째 챕터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인데, 결국 왜 죽지 않는지, 죽기 전에 어떤 모습을 그릴 지를 통해서 지금의 삶, 앞으로의 삶을 성찰하는 내용이 담겨있다.
물론 이런 질문들을 던지지 않고 우리는 충분히 잘 살 수도 있다. 그저 오늘의 삶을 영위해 나가는 수많은 소시민들이 있고, 그 것을 비판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소시민들 또한 나름의 세상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니까. 그렇지만 단지 타성에 젖어서 사는 것, 하루하루를 ‘살아 나가는 것’이 아닌 능동적으로 삶을 ‘살아내기’위해서는 한 번 죽음의 문턱 앞에서 내 미래를 바라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이를 위해서 먼저 우리는 삶의 무엇이 의미가 있는지, 우리를 풍요롭게 만드는지 진지하게 사유해봐야 한다.
“계속 살아갈 만큼 인생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P.36)
자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의 생을 풍요롭게 만드는가. 먼저 그를 알아보기 위해 우리의 제한적인 시각, 어쩌면 확증편향일 것들을 제거할 필요가 있다. 초등학교 때 음식을 버리면 지옥에서 먹는다는 친구의 말에 음식을 버리고 한 달 악몽을 꿨던 것이나, 고등학교 무렵 수능을 앞두고 걱정했던 것은 정말 지금에 와서는 그렇게 고민하고 괴로웠던 것이 멍청해 보일만큼 사소해 보인다. 그러나 당시에는 정말 큰일처럼 느꼈고, 인생의 끝이나 중대사 같았다. 이처럼 우리는 지금도 아무 것도 아닌 것에 집중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죽음을 방정식에 넣음으로서 은 우리에게 조금 더 넓은 시야를 가질 수 있고, 가져야 한다.
삶은 어떤 거대한 것이 있다. 어쩌면 불가지론적인 입장이라는 비판을 감수해야 할지도 모르지만, 형이상학적으로 고차원으로 향하지 않더라도 우리 소시민의 수준에서 달성할 만한, 생각할 만한 중요한 인생의 줄기들이 있다. 우리는 <숨결이 바람 될 때>에서 저자 폴이 죽음을 앞두고 생각했던 인생의 중요한 것에 대해 고찰해볼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친구, 가족과의 연대감과 사랑이 있었다. 그것을 위해 결혼 생활을 포기하지 않았고, 아름다운 아기도 낳았다. 그리고 인생의 목적성으로 생각했던 생각한 것, 신경과학에 대한 열정을 저버리지 않았고, 레지던트 과정을 끝마치는 열정을 보였다.
작가 Emily Esfahani Smith의 TED강연<삶에는 행복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에서 에밀리는 삶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로 ‘목적성, 초월성, 스토리텔링, 연대’를 꼽았다. 삶에서 자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목적성이 있어야 하며, 그 길을 함께 하는 사람들과의 연대를 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초월성을 느끼며 인생을 스토리텔링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남반구 최초의 절을 세운 이 시대의 현자, 아잔 브라흐마가 쓴 <술취한 코끼리 길들이기>에서 브라흐마는 불교적 민담, 이야기, 경전을 해석하면서 인생에 대해 논한다. 그에게 있어 인생을 이루는 핵심적인 것은 배려와 나눔, 연대와 사랑이었다. 우리 모두가 인생의 핵심을 논하면서 조금 더 현명함(불교적 용어로 ‘깨달음’)에 다가설 수 있다는 것이다.
유시민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왜 자살하지 않는가에 답하며 그는 삶을 관통하는 네 가지 요인을 제시한다. 놀고, 일하고, 연대하고, 사랑하는 것. 자신이 좋아하고 집중하며, 생활을 영위할 일이 진지하게 고민되어야 하고, 놀이와 사람들 간의 연대, 다른 존재와의 사랑 또한 필수적이다. 사실 이 책을 보고 <숨결이 바람될 때>를 읽으면 두 사람의 생각의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는데, 둘의 유사한 철학적 사고, 비슷한 독서 목록을 생각하면 그리 놀랍지 않다. 거꾸로 생각하자면, 이러한 죽음을 통한 인생에 대한 핵심의 고찰과 결론들은, 인류 지성인 다수가 큰 흐름에서 공감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 사람들이 주장한 구성 요소들이 정답이라곤 할 수 없다. 모두에겐 각자의 사유가 있고, 시대마다, 지역마다, 세대마다 가치는 꾸준히 변해왔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시대의 현자들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인생을 관통하는, 삶에서 중요한 키워드들이 존재한다는 것이고 그 것을 파악하는 것은 자신에게 맞는 방식을 과정에서 좋은 배움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시대의 흐름과 주류 문화는 우리에게 인생의 풍요를 증진시키는 길로 가고 있는지 심히 우려스럽다. 과연 더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진 사회, 자본의 확장, 쉬워진 정보의 접근은 우리를 인생의 가치들을 고민하게 하는 길로 인도하는가? SNS와 거짓 뉴스, 쓰레기 정보와 관계들에 둘러싸여 우리 모두 정말로 중요한 가치를 놓치고 있지는 않은가?
비단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전 세계의 지식인들이 모이는 자리에서의 화두는 ‘요즘 세대는 왜 이렇게 책을 안 읽죠’라는 질문이다. 물질주의와 황금만능주의에 빠져 피상적 사회가 되고, 지식인은 사회적으로나, 계급적으로나, 권위적으로 무너진 듯 보인다. <숨결이 바람될 때>의 폴의 세대만 하더라도 문학은 인류에게 나름의 중요성을 지니고, 사회 지도층의 필수적 교양으로 여겨졌다. 진지한 인생에 대한 사유, 고찰, 이에 대한 토론은 상당히 다양하고 질적으로 의미 있었다.
하지만 미래의 사회 지도층이 될 우리 의대생만을 봐도 문학, 사유, 인생의 핵심에 대한 고민, 고찰이 주류는 아닌 것 같다. 되려, 지식인이 몰락하듯 단지 이것들은 ‘노잼’의 영역으로 들어서서 모두가 숨어서 혼자 생각하는 사회가 모른다. 단지 지금의 피상적인 우리들의 삶은 롤(LOL; 남자들 사이에서 가장 유행하는 게임)과 화장품, 뷰티,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 유튜브에 잠식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어떤 이는 이 것을 세대의 차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우리 세대가 책이 아니라 다른 소셜 네트워크 방식을 사용해 연대의 가치를 실현하고, 인터넷으로 더 다양하고 진지한 정보들을 쉽게 접할 수 있다는 것이다. 페이스북, 애플, 구글이 그렇게나 광고하듯, 기술의 혁신과 이 시대의 흐름 속에서 다양한 도구들은 인간을 더 풍요롭게 하고, 연결하고, 행복하게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진심으로 SNS, 인터넷을 통해 다른 방식으로 인생에 대해 고찰하고, 연대하는 것이 과연 고찰과 연대라 할 수 있는가? 물질주의의 탈을 쓰고 소통의 탈을 쓴 채 모두가 자신의 말을 하며 말초적 쾌락에만 집중하는 것은 단연코 인류를 위한 방향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과연 이들은, 우리들은 자신의 삶을 영위하고 있는 것인가? 정말로 삶을 풍성하게 만들기 위한 ‘정보’가 공유되고 소비되는가?
그 유명한 조지 오웰의 <1984>(1949)에서 그가 우려했던 정보의 검열, 정부에 의한 감시와 통제는 일어나지 않았고, 단지 북한 같은 주류 세계의 변방에서만 찾을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비슷한 시기에 미래를 예측한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1932)가 예측한 세계는 안타깝게도 현실로 다가온 것으로 보인다. 그가 우려했던 사회, 사람들이 너무 많은 정보 속에서 자신들의 삶의 목적성을 상실하는 것, 즉 욕망과 말초신경의 쾌락이 사회를 지배하는 디스토피아는 우리 곁의 현실이 되었다. ‘그 누구도 책을 읽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에 굳이 책을 금지할 필요조차 없어진 세상’은 조금 섬뜩하지 않은가? 제공된 쾌락에 의해서만 우리가 통제 당한다면 우리가 주체적 인간인지, 인간적 사유는 어디 있는지 모두에게 묻고 싶다.
한참 청춘의 맛에 들떴었던 본인의 스무 살,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에 빠져있던 때가 있었다. 그러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맛집을 찾는 것, Junk News들과 가십이 인생의 큰 부분을 차지하게 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어보였다. 좋아요가 5000개를 돌파했다는데, 자기 과시가 아닌 진심으로 내적 성장이 일어났는가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내 답은 그렇지 못했다. 그렇게 한 달 전, 페이스북을 비활성화 했다.
“사뮈엘 베게트의 구절이기도 했다. ‘그래도 계속 나아갈 거야.’ 나는 침대에서 나와 한 걸음 내딛고는 그 구절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P.63)
세상이 어떻든 간에, 우리는 계속 나아가야 한다. 죽기 전에 나는 내 삶을 어떻게 평가할지 고민해본다. 단지 말초 신경이 즐거웠던 시간으로 인생을 돌아보는 것은 끔찍할 것 같다. 사랑, 연대, 초월, 목적성 같은 가치들이 나를 가득 채운 죽음이 되고 싶다. 좋아요에 잠식된, 어쩌면 오염된 세상에서 조금은 거리를 두고 사유의 바다에서 잠시 해수욕을 하는 이런 시간이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지 않을까.
본문 끝(세 페이지)
[1] 유시민, <어떻게 살 것인가>, 아포리아, 2013
[2] 미치 엘봄,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Tuesdays with Morrie), 강주현 역 세종서적, 1997(2004)
[3] 아잔 브라흐마, <술취한 코끼리 길들이기>(Who ordered this truckload of dung?), 류시화 역 연금술사, 2004(2013)
[4] Emily Esfahani Smith, TED강연<삶에는 행복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There's more to life than being happy), 2017
[5] 조지 오웰, <1984>, 민음사, 2009(1949)
[6] 올더스 헉슬리,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 민음사, 2009(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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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었습니다~
그래요, 종국에는 늘 죽음이 승리하고 말지요.
그래도 사는 동안 삶은 여전히 찬란한.
‘그래도 계속 나아가’는 게 또한 삶.
‘그 누구도 책을 읽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에 굳이 책을 금지할 필요조차 없어진 세상’은
끔찍하다 자각하면서.
배움이란 게 결국은 타자를 이해하기 위함이라는 생각을 요새 많이 합니다.
많은 책, 강연이 축적 이상의 사건이 되려면 비판적 성찰이 작동해야 된다는 말에도
절대적으로 공감합니다.
배우고 놀고 일하고 사랑하고 연대하기,
물꼬에서 우리 늘 해왔던 것이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들이지요.
삶이 승리하는 것도 그 기반에 있지 않나 싶어요.
그리고, ㅎㅎ 아래 문장은 비문이군요...
‘되려, 지식인이 몰락하듯 단지 이것들은 ‘노잼’의 영역으로 들어서서 모두가 숨어서 혼자 생각하는 사회가 모른다.’
띄어쓰기 하나도 짚어요^^ 이것을, 이것저것, 이것은 붙여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