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1.27.흙날. 맑음

조회 수 400 추천 수 0 2021.12.30 12:03:12


얼마 전 속을 좀 끓인 한 품앗이에게 글월 하나 보내다.

안셀름 그륀 신부의 <너 자신을 아프게 하지 말라>의 몇 문장.

 

네 자신을 아프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네 자신 뿐이다.(...)

우리 모두는 늘 우리를 비난하는 사람들을 배심원석에 앉혀놓고 피고석에 앉아 우리의 행위를 변명하고자 하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다.(...)

사람들은 사건 때문에 혼란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든 사건에 대한 표상 때문에 혼란에 빠진다.

죽음이 끔직한 것이 아니라 죽음에 대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표상이 끔찍한 것이고

깨어진 꽃병 자체가 끔찍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자신과 꽃병을 동일시하여 꽃병이 깨어져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고

온 마음으로 꽃병에 집착하는 것이 상처를 입히는 것이다.’

 

이제 피고석을 떠나시라 하였네.

 

고래방 앞 김치통들을(항아리는 아니고 커다란 고무통. 거기 김장비닐을 까는) 씻었다.

곧 김장을 하고 묻을 테니까.

다섯을 다 채우던 살림은 이제 두 통을 묻고 있다.

쓸쓸하다거나 회한으로 하는 말은 아니고, ‘그러하다고 말하고 있는.

 

대처 식구들이 사는 곳의 살림은 옹색하다.

식탁만 해도 좁다.

오래전 기락샘이 혼자 살던 살림에 내가 나무로 만들어 보낸 것이었으니 2인용으로도 빠듯한.

같이 보낸 거실 응접테이블은 꽤 넉넉한데,

당시 살던 집 부엌이 좁아서도 조그맣게 만들어 보냈던.

혼자 살아도 엉덩이 걸치고 잠깐 앉아 뭘 좀 먹을 수 있도록.

아들이 합류한 뒤로도 아직 그 식탁을 두 사람이 쓰고 있다.

거기 세 식구가 다 모여 앉자면...

서구식으로 큰 접시를 하나씩 안고 앉는 방식이거나

메인요리에 두어 가지 찬으로만 간단하게 차려 먹는.

물꼬에서는 멀리서 오는 이들을 잘 멕여 보낸다고 반찬을 여러 가지 올리고,

배식대도 시원시원하게 넓으니 이것저것 자꾸 올리게 되는.

식탁 역시 널찍널찍 하니까.

물건을 만들고 오래 잘 쓰이면 좋은.

아직 변함없이 튼튼하고, 이 살림으로도 잘 쓰이고,

식구들도 쓰면서 또한 애정이 담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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