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월대보름 나물밥을 절집에서 먹었다.
남양주 천마산 봉인사에 들리다.
가평의 작은 예술제에서 함께 돌아오던 재형샘 승엽샘 준찬샘이 동행하다.
광해군 원찰이었던 봉인사는 구한말 완전히 소실되었던 것을
40년도 더 전에 적경스님의 아버님이었던 한길로 법사님이 터를 마련하고 중창했다고.
광해군 묘가 봉인사 길목에 있었다.
적경스님이 내주신 차를 마셨고,
시주 대신 스님의 책 두 권을 사오다.
<바우이야기-모든 이를 위한 명상동화>는 두엇의 입을 통해 들었던 바.
책 가운데 애벌레와 나비가 등장해서도 그렇겠지만
트리나 폴러스의 <꽃들에게 희망을>을 생각게 했다.
바우는 행복을 가르쳐줄 스승을 찾아 길을 떠난다.
길 끝에 만난 물이 말한다.
“바우님, 과거는 지나간 현재고
미래는 오지않은 현재일 뿐이죠.
그러니 늘 지금, 행복을 느끼면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한 행복이랍니다.”
어떻게 하면 현재를 느낄 수 있는가 바우가 묻는다.
“좋고 나쁘고 하는 구별은 우리가 갖고 있는 가치 기준에 맞춰 판단하는 거부의 행동이랍니다.
지금의 모든 걸 받아들이세요.
그냥 지켜보세요.(...)
볼 땐 봄, 봄,
들을 땐 들음, 들음,
가려울 땐 가려움, 가려움,
생각이 일어날 땐 생각, 생각하고 말예요.
그러면 받아들인다는 의미를 알게 될 거예요.”
바우는 벅찬 마음으로 저 멀리 우뚝 솟은 큰 바위를 향해 달려가 제가 찾은 것들을 나누고자 한다.
“나라고 하는 존재,
나를 한정짓고 있는 생각을 버리시고
모든 것에 감사해 보세요.”
하지만 큰 바위는 바우가 딴 세상 말만 하는 것 같다며
진정한 행복을 가르쳐줄 스승을 찾아 그 역시 여행길에 오른다.
이미 보고 온 이가 있어도
우리는 여전히 길을 떠난다. 그가 내가 아니므로.
책은, 지루하고 낡은 느낌이었다.
모험이 아니라 관념으로 들렸기 때문인가...
곱씹어보니
어쩌면 이미 내가 오래 머물렀던 생각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새삼스러울 게 없다는.
그렇다고 이 책의 가치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누구에겐가는 또 귀한 깨달음일.
내가 지나치게 낡아버린 어른이 됐기 때문일 수도.
물꼬에서 수행하며 관통해온 질문 혹은 답이었으므로 너무 평이하게 느껴진 듯.
익숙했으므로.
요새는 행복찾기보다 평안하기에 더 생각을 모은다.
행복은 더, 더, 더한 행복이 있는 듯해서
그것 역시 욕망의 단계로 보이는데 반해
평안은 그 하나로 온전히 완성체 같아서.
우리가 찾은 행복 혹은 평화는 얼마나 깨지기 쉬운가.
오죽했으면 위대한 고승들도 득도로 끝이 아니라 날마다 수행하겠는가.
왜? 유지가 안되니까.
서울로 돌아온 일행들이
젊은 날 오래 산을 탔고 옥을 다루고 사진을 찍는 재형샘댁에 다시 모였다가
흩어졌다.
기차를 타고 내려왔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