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절반의 운동장에, 오늘 나머지에 예취기가 돌아갔다.
아이들은 내 학생이었고
아이들은 아이들로 이미 동료였지만
학생들은 자라 분명한 동료가 되었다.
아이들은 잠재적 동료다.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것은
언젠가 이들이 내 동료가 된다는 믿음 위에서 하는 일이다.
우리가, 우리가 살고 싶은 세상에 대해서 말하고
아이들이 그 세상을 같이 만들어 갈 동료가 되어 가는 일,
그것이 가르치는 세계다.
그래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은 긴장을 동반한다.
한 벗과 문자가 오간다.
‘어제 투쟁선배 만나서 정체성 논란에 좀 다운됐었는데,,’라고 그가 썼다.
‘아이덴티티는,
증명하지 않고 이미 존재로 가지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은.‘이라고 답했다.
얼마 전 마상을 입었다 그가 말했다.
말로부터 입은 상처를 말함인가, 마음의 상처를 말함인가.
마음의 상처라고 했다.
사는 일이 그렇다. 그런 일이 없기 어렵다.
그 상처를 어떻게 대하고 어떻게 나아가는 가가 중요할.
소리를 가르쳐 달라고 했다.
다른 데서 오래 소리를 배우던 그다.
가을학기나 짬이 날 듯한데, 같이 연습이나 해보자 했다.
‘이런 만남을 좋아하오.
그저 만나 노는 만남은 별로고, 이리 뭔가 하는 관계 좋소.
그저 소모적인 건 별로라.’
마지막 문자 쯤에서는 이리 썼다.
‘가끔 사는 게 뭐 이러냐 싶다가
그래도 살고 살고 살고.
그게 인간의 혹은 생명의 숙명이려니 하고.
우리 생을 ‘기쁨’으로 삽시다!’
그도 마지막쯤의 문자를 보내왔다.
‘맞아.
부처님 말씀이 딱 맞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아요.
아무것도 없는데 내가 만드는 고통에서 허우적댈 때가 많아.
기쁨으로 삽시다에 동의.’
우리가 생각하고 열망하고 설명하는 모든 것은 그저 허상이라고 말하는,
자신의 꼬인 마음을 해결하려 애쓰는 대신 삶을 알아가는 창조적인 프로젝트에 더 집중하자는
그런 책 하나 소개해주었네.
그건 나도 다시 그 책을 곱씹어보겠다는 뜻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