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철입니다, 윤,현,철!”
늦은 저녁이었다. 수화기 너머에서 그가 외쳤다.
오후에 전화가 들어왔고, 못 받고 문자를 남겼고,
그러고도 연결을 못하고 있다가 다시 문자를 남겼던 터다.
통화 가능하냐, 문의사항도 있고 인사도 하고 싶다는 문자가 곧이어 왔더랬다.
문의라면 학교에 대한 것일 테고, 인사라면 아는 사람이거나 누구의 소개이거나.
다른 까닭도 있을 수 있겠지만.
여러 시간이 흘러서야 그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윤현철.
몇 손가락에 꼽는 최고의 학생으로 기억한다.
1등을 하는 아이였고, 전교회장을 했지만,
더 두드러진 건 그의 착한 심성이었다.
곱고 반듯하셨던 그의 어머니를 기억한다.
두 살 아래 그의 동생도 내 학생이었다.
그 때의 내 글쓰기 수업은
만 2년(학년으로 3년 과정) 과정을 끝내고 그간의 작업물을 엮는 것으로 갈무리가 되었다.
5학년 때 만난 그네는 6학년을 지나 중학 논술수업과 문법까지 하고 마쳤더랬다.
그때 그 댁엔 막둥이 아이가 걸음마를 하고 있었다.
그 아이가 자라 서른셋이 되었단다. 그와 열 살 차이가 나는 동생이었다.
그러니 우리 인연이 무려 30년 전으로 거슬러간다는 얘기다.
오는 여름 백일흔네 번째에 이르는 계자가 시작된 1994년 여름,
서른 한 명의 어른들과 여든일곱의 아이들이 설악산에 들어 첫 계자를 꾸렸다.
그 원년구성원에 그가 있었던 것!
내 20대가 그들에게 있었다.
이제야 하는 고백 하나,
스무 살 중반의 나는 영리하고 예리하던 그가 인정해주는 교사라는 게 늘 기쁘고 고마웠다.
그를 더욱 잊을 수 없는 까닭일 테다.
우리는 3년의 긴 수업 여정이 끝난 뒤에도
그들의 고교 2학년 봄방학까지 만났다.
‘관악모둠’이라 불렀던 그 패 말고도 그 시기 같은 또래의 아이들이 있었다.
청담동 ‘탱자모둠’, 목동의 ‘목동(?)모둠’, 방이동 ‘솔개모둠’, ...
해마다 2월이면 같이 대성리로 모꼬지들을 갔다.
현철, 헌수, 승아, 현아, 윤하, 영수, 승윤, 민수, 대웅, 세온, 보배, 희정, 윤선, 태정, 보원, ...
군대를 제대하며, 대학을 졸업하며, 결혼을 앞두고 소식을 전하거나 인사를 해왔더랬다.
그가 재수를 시작했다는 소식을 마지막으로 들었다.
아이를 낳고 그 아이들을 키우며 물꼬 생각을 했다지.
계자를 보내야지, 주말학교에도 보내야지, 그러고 있던 차에
그 걸음을 서두르게 해준 계기는 뜻밖의 곳에서 일어났다.
우리 집 아이가 이번에 의료계 혼돈 속에 이름이 오르내리자
그 아이 이름에 엄마 성이 들어간 걸 보고
이건 앞뒤 볼 것 없이 옥영경 선생님이라고 바로 생각했더라나.
그러니까 그는 우리 집 아이와 동종업의 선배였더라.
“10년 만에 당직을 서고 있네요.”
의대 교수로 있는.
자기 과는 그래도 좀 낫다고,
이번 상황이 수습이 되는대로 아들 손 붙잡고 다녀가겠노라 했다.
세상에나! 그 댁 전화번호 끝 번호가 다 생각났더랬네.
밀려드는 그 시절.
그런 시간을 건너 지금에 이르렀다.
지금이 좋으니 지금에 이르게 한 과거도 좋다.
지금이 좋으면 미래에 대한 기대도 높다.
그러므로 지금 좋기, 지금 좋기 위해 지금에 집중하기로.
그렇게 잘 사는 걸로 서로에게 힘이기로, 그것으로 세상에 기여키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