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10.11.해날. 꾸물꾸물

조회 수 876 추천 수 0 2009.10.23 22:34:00

2009.10.11.해날. 꾸물꾸물


가을이라 그랬을 겝니다.
아이랑 마을길을 걷고 있었는데,
걸음 하나 하나가 다 느껴지고 있었습니다.
한 발 떼어놓으면 꼭 그만큼 앞으로 나아갔지요.
그래요, 어데선가 그런 문장을 본 적이 있습니다.
‘걸음, 내가 한 발 떼어놓으면 딱 그만큼 내가 앞으로 나아간다.
얼마나 정직하냐.’
그러게요, 얼마나 정직하니이까.

식구한데모임이 있는 저녁입니다.
머물고 있는 이들도 같이 모여
한 주를 돌아보고 다시 새 주를 맞는 자리이지요.
오늘은 서너 달을 머물 분도 같이 앉았습니다.
사람들이 이곳으로 오면서 하는 고민들 가운데 하나,
특히 여성들의 고민은
여기 있는 여자들과 성격이 맞을까 어떨까 걱정한다 했습니다.
그런데 맞는 성격이 어디 쉬운가요.
맞춰가면서 사는 거지요.
더구나 머물다 갈 것 같으면
굳이 뭘 맞춥니까,
찾아든 내가 맞추어야지요.
“그냥 (이곳에) 맞추세요!
왜 맞는지 고민을 합니까, 계속 살 것도 아니고.
그가 정말 악한 게 아니라면(나쁜 짓을 한다면 모를까)
웬만하면 내가 맞춰서 지내야 합니다.”
(이 말은 일정 정도 물꼬의 달라진 태도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전 같으면 ‘뭐 미리 걱정하느냐, 서로 잘 맞춰나가자.’,
그리 말했을 테니까요.)
그러면서 다른 나라 공동체에 다니던 때의 경험을 꺼냈습니다.
그 두어 해 동안
방문하는 공간이 내게 맞을지 어떨지 고민 하지 않았습니다.
거기 있는 사람에게 역시도 그런 고민 하지 않았지요.
머물 수 있도록 허락해주어 고마웠고,
제가 맞췄습니다.
어디 나랑 맞는 사람만 있었을려나요.
그런데도 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어째서 그러했던 걸까요?
내가 거기를 책임지며 살 게 아니니까 그랬던 게 아니었을지요,
떠나올 사람이었으니까.

다음으로 나온 이야기도
물꼬의 변화를 읽을 수 있는 얘기였습니다.
흔히 어디 가면 내 집 같이 편히 지내세요, 합니다.
물꼬로 오는 이들에게도 그간 그리 말해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다르게 말합니다.
사실은 이리 말한 게 오늘 처음이었습니다.
앞으로도 주욱 그리 말하려지요.
“아니요. 남의 집 같이 지내세요.”
왜냐구요? 남의 집이니까요.
그러면 외려 예의가 생깁디다.
우리는 ‘남’에게 정작 잘하지 않던가요.
웬만큼 가까워지면 바램도 커지고
그런 만큼 서운함도 커지고 말입니다.
오히려 남의 집이거니 하면
적당한 긴장감도 생기고
지나친 기대 없이 관계를 잘 맺을 수 있지 않나 싶데요.

또 한 가지가 있었네요.
건강을 회복하려고 찾아오는 이들이 자주 있습니다.
물론 물꼬랑 오랜 인연들이시지요.
얼마 전에도 아이를 데리고 한참을 머물려고 온 이가
어렵사리 물어왔습니다,
생활비를 어찌 내면 좋겠냐고.
생각 아니 해봤습니다.
대부분은 이곳에서 제 몫의 일을 하며 지내는 방식이니까
따로 숙식하는 값을 내지 않았지요.
“생각해보진 않았는데, 서로 고민을 해보죠.”
그리고 그 며칠 뒤 생활비를 보태는 게 좋겠다 대답했습니다.
살림이 궁해서도 그렇고,
무엇보다 이곳에서 먹고 사는 데 맘 편하려면
내가 뒤적거려 김 하나라도 편하게 꺼내 먹으려면
그게 더 낫지 않을까 싶었던 겁니다.
때로 이렇게 선을 좀 긋는 것들이
관계를 더욱 건강하게 하기도 한단 걸 알게 된 것도
물꼬, 아니 제 변화 한 가지이네요.

피고 지는 자연처럼
사람도 조금씩(때론 성큼) 여러 변화들을 겪으며 생을 끌고 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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