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11.20.쇠날. 맑음 / 단식 이틀째

조회 수 982 추천 수 0 2009.11.27 11:03:00

2009.11.20.쇠날. 맑음 / 단식 이틀째


농기구 옆 낙엽들을 정리하는 날입니다.
단식 가운데도 일상적인 일들은 그대로 돌아가지요.
운동장 안 감나무 세 그루에
아이들이 눈 똥과 낙엽을 섞어 만든 거름도 잔뜩 뿌렸습니다.
오후에는 햅쌀을 찧었지요.
오늘에야 햇곡식으로 밥상을 차렸더랍니다.
한 해 농사에 함께 한 모든 이들,
그리고 하늘과 땅과 바람과 산과 이슬에 감사드립니다.

“미국의 한 신흥도시에서
부동산업자가 큰 백화점을 지으려고 하는 부지를 돌아보고 있었어.”
등 뒤에서 안마를 해주고 있는 아이에게 들려줍니다.
“마음에 들었고 그곳을 사려는데
하필 그 중심에 낡고 오래된 중국인 가게가 있었네.”
할아버지 때부터 3대째 해오던 가게였고
아들에게도 그 업을 물려주고 싶어 하던 주인은
시세의 배가 넘는 돈을 준다 해도 팔기를 거절했지요.
부동산업자는 그 가게를 가운데 놓고 거대하게 양쪽으로 백화점을 지었고
드디어 개장날이 되었습니다.
건물 벽을 따라 길게 드리운 현수막이 화려했겠지요.
작은 가게는 더욱 작아보였을 것이고
주인의 마음도 무서움이 들기까지 하였더랍니다.
“주인은 그 위기를 어찌 넘어갔을까?”
그러게요, 주인은 다음 행동을 어찌 하였을까요?
가게 밖으로 나온 주인은 양쪽 백화점을 현수막 사이에,
그러니까 자기네 가게에 역시 현수막을 걸었습니다.
거기 ‘입구’라고 적혀 있었지요.
"아주 두려운 상황에서도
다른 각도로 보는 눈이 우리를 때로 위기에서 구해주지."
도서관 서가를 걷다가 발견한 책 한 권에서 얻은 지혜였더랍니다.
책을 만나는 일에 대해서도
얘기 나눈 저녁이었지요.

특수학급에 가는 쇠날입니다.
낯이 익은 아이들이 반깁니다.
사람 사이에 그렇게 시간이 쌓이는 일은, 고맙지요.
서서히 서로에게 젖어가는 시간이 참 좋습니다.

아이랑 시장을 좀 돌아다녔습니다.
한 교사가 준비하는 장학수업을 돕고 싶었습니다.
도형을 쿠키를 만들며 가르치고자 하는데,
그러니 찍어낼 도형틀이 있으면 딱이겠지요.
그릇가게란 가게는 다 들여다보고
팔만한 가게들도 다 기웃거려봅니다.
두어 가지 다른 종류를 구하기는 하였으나
도형은 아니네요.
아쉬운 대로 정히 없으면 이걸 변형해서라도 쓰라고
준비해 봅니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쓰는 건 시간을 내고 마음을 내는 거란 생각이
새삼 듭디다.
이번 학기 제 일을 크게 도와주고 있는 이에게
이렇게라도 인사 한 번 할 수 있었더이다.

달에 한 차례 지역 도서관에서 마련한 특강이 있었습니다.
오늘은 정조와 다산이 이룩한 수원화성에 얽힌 이야기가 주제였지요.
그런데 정작 그 건축물이 지닌 가치보다
그것을 통한 의식고양을 너무 급격히 다루는 바람에
아쉬움이 많았네요.
하지만 이런 일이 계기가 되지요.
복원된 수원화성으로 다음 역사탐방을 잡아야지 하게 되었답니다.

읍내에서 돌아오기 전,
선배 하나가 출장을 다녀오며 영동에 들렀습니다.
맛난 저녁을 사주겠다하여
아이가 잘 먹고 들어왔네요.
아이 옷을 건네주고 갔습니다,
에미가 못 입힐 거라며.
두툼한 겨울잠바입니다.
부쩍 크고 있는 아이이지요.
늘 고마운 그늘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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