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11.30.달날. 맑음

조회 수 983 추천 수 0 2009.12.06 01:56:00

2009.11.30.달날. 맑음


바쁜 아침
학교 뒷마을 댓마에서 할머니 한 분 건너오십니다.
느지막한 아침을 먹고들 있었지요.
서류 하나를 보이러 오셨습니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대부분인 마을에서
글을 보아야 하는 일은 주로 학교 몫입니다.
얼마 전엔 송사할 일로 여러 차례 다녀가신 할머니도 계시지요.
3년 전에 빌려주었던 논이 지금에 와서 일으킨 문제를
할머니 혼자 감당해내려니 뭘 어째얄지 모르시겠는 거지요.
우리라고 별 수가 있는 건 아니지만
이러저러 알아보고 하며 도울 길을 찾아보았더랬답니다.
그렇게 우리가 쓰일 수 있으면 고마울 일이다마다요.

아랫목에 띄워두었던 청국장이 내려옵니다.
절구에 찧지요.
실들이 주욱 죽 늘어납니다.
당장 끓여내 보지요.
어찌나들 맛나게 먹는지...
고추장도 완성입니다.
중 항아리 두 개를 가득 채우고도 남아
커다란 통에도 담지요.
“너무 싱거워 꽃가지 필라네.”
어머니는 지난 번 오셨을 적 담아주셨던 장독대의 동치미를
다 꺼내 김치통에 넣어도 주시고
마지막에 나온 그릇들도 설거지통에서 죄 부셔주셨지요.
비로소 김장일이 끝낸 셈입니다.
간밤에 그토록 앓았던 어머니는 일어나니 몸이 가뿐해지셨다며
굳이 병원까지 갈 일은 아니겠다셨습니다.
우리들의 어머니는 언제나들 그러시지요.

뜻밖에 종대샘이 이른 아침 하루만에 다시 나타났습니다,
아무래도 방바닥 일을 마저 해야겠다고.
낮에 좀 쉰 뒤
저녁에 찹쌉풀을 쑤어 방바닥에 광목을 붙이기 시작하였는데
세 사람이 붙어서도 몇 장 붙이질 못하였네요,
워낙 조각천이어.
이제 또 남은 이들의 일이 되었습니다.
둘째 주까지 처리해얄 일이 있으니
그 뒤 식구들이 다 붙어 해야겠지요.
“그런데 바닥이 울퉁불퉁한데...”
초배지를 붙이고 튀어나온 것들을 밀고
그 다음 천을 붙이고 기름을 먹여야는 거 아니냐는데,
그런 거 다 고정관념이라는 종대샘 주장입니다.
글쎄 그렇게 되는 걸까요?
꼭 매끈할 필요가 있냐는데,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그가 전문가이니 일단은 그리 해보기로 하지요.

오후에 가볍게 봐야할 시험 하나 있었습니다.
그리 어려운 게 아니어서도 그랬겠지만
김장 하는 틈틈이
간밤에도 새벽에도 충분히 책을 들여다 본 덕분에 수월했습니다.
“아고 억울하네, 공부를 너무 시게(세게) 했어.”
그렇게 까불락거리지만
충분히 하면 편하게 볼 수 있는 거 아닐지요.
돌아오는 맘이 가뿐했더랍니다.
저녁에는 겨울계자를 알리는 보도의뢰를 몇 곳에 보냈습니다.
오랜 세월 다른 이들이 하던 일입니다.
그런데 해보니 그리 어려운 일들이 아닙니다.
다만 낯설었던 거지요.
보다 자립적이기 위한 노력들을 계속하는 몇 해랍니다.
은행 일에서부터
도대체 일상적인 일들을 할 줄 아는 게 거의 없던 삶이었더랬습니다.

새벽마다 날아오는 편지 하나 있습니다.
특정다수에게 보내지는 이메일이지요.
‘오래간만에 사무실에 늦게까지 남아
일 처리가 아닌 나와 컴퓨터의 관계를 회복하는 중이다.’
고치러 보냈던 컴퓨터가 일주일 만에 돌아왔는데
배송 중에 충격이 있었던지 작동이 안돼
몇 가지를 다시 빼고 넣고 반복해보았으나
그래도 완전하지 않더랍니다.
‘몇 가지 포트들의 연결 때문에 다시 시간을 소비해야 했다.
이런 문제는 해결하지 않으면
다른 일을, 다른 진도를 나갈 수 없다.’
그간 했던 작업물들 가운데 찾을 수 없는 것도 생겼을 테지요.
‘사람과 기계의 관계는 즉물적이고 반응은 즉각적이다.
그리고 지금은 관계가 깨어진,
즉물적이고 즉각적으로 해결되지 않는,
사람의 일에 대해 잠시 생각했다.
감정이란 이름으로 불리는 사람의 어떤 상태는
어쩌면 더운 여름의 털외투 같은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벗는 것이 그리 힘든 모양이다.’
날이 더워져도 벗지 못하는 겨울외투,
그게 물꼬에만 있던(물꼬가 자주 표현하던) 외투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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