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12. 3.나무날. 맑음, 눈처럼 내린 서리

조회 수 1124 추천 수 0 2009.12.15 14:14:00

2009.12. 3.나무날. 맑음, 눈처럼 내린 서리


산마을이 온통 하얀 아침입니다.
서리가 그리 내렸더이다.

통마늘을 하나 하나 떼고,
오후에는 마늘밭 두둑을 올렸습니다.
밭 패고 둑 올리고 마늘 넣고,
하려들면 하루 일에 불과하지요.
그런데 해짧은 산마을에서 쉬엄쉬엄 한답니다.

읍내 나갔습니다.
“어, 엄마!”
아이가 요즘 읽고 있는 한 질짜리 역사책에 푹 빠져
제 가방도 안 챙기고 차에 타서는
그걸 십여 분도 더 달려간 뒤 알아차렸더랍니다.
“엄마, 화내지마. 그러면 힘들잖아.”
아고, 화도 못 냅니다.
화도 아이가 어릴 적에야 낼 수 있지
이제 그럴 나이도 지나가버린 것입니다.
꼭 같은 방식으로 화내기를 배울까도 걱정이고,
그렇게 내는 화가 실제 행동을 변화시키는 자극제가 되는 게 아니라
아이에겐 화만 기억되기 쉬운 까닭이라 더욱 그러합니다.
“엄마, 솔직히, 화내면 ‘화’만 기억나.”
언제나 그렇듯 아이들이 어른을 가르칩니다.

달골에서는 경제통인 행운님과 아이의 대화가
밤 깊은 줄 모르고 이어집니다.
사람 귀한 산골,
게다 배움에 목마른 아이에게
아이를 귀하게 대하며 끝까지 이야기를 끌고 가주는 어른이 쉽지 않지요.
달골 어른들의 큰 역할 가운데 하나가 그것이지 싶습니다.
고맙습니다.

지리산 아래 깃들어 사는 이 하나 압니다.
점심 무렵에 양파를 심었답니다.
마을에서 가장 늦었지 싶다지요.
“하늘과 땅과 바다를 통 털어 식물보다 강한 것은 없다.
양파가 늦어진 이유는 물론 만인의 변명이기도 한
'바빠서' 라는 것이지만
본질은 계획적이지 못했거나 게을렀기 때문일 것이다.
텃밭에 빈 곳이 보이고,
시기에 있어야 할 작물이 보이지 않는 것은
도시에서 사는 놈이 BC카드, 삼성카드,
현대카드 따위 중 뭔가가 없는 것과 같은 일이다.”
그리고 이어 그는 이리 쓰고 있었습니다.
“나는 신용카드가 없다. 양파가 있다.”

책 <생각의 탄생>(로버트, 미셸 루트번스타인/에코의 서재).
생각을 일궈내는 열세 가지;
관찰, 형상화, 추상화, 패턴인식, 패턴형성, 유추, 몸으로 생각하기,
감정이입, 차원적 사고, 모형 만들기, 놀이, 변형, 통합.
그 열세 가지 길에 대해 아이랑 얘기 나누었더랍니다.
서로 읽고 있는 책에 대한 대화들 역시
좋은 공부 아니겠는지요.

오는 16일 물날 늦은 오후에
판소리공연 하나 하기로 하였습니다.
지역의 한 예술인대회에서이지요.
그런데 이 국악의 고장에서 판소리를 하는 이가 드물어
고수 찾기가 쉽잖습니다.
뭐 그렇다면 장단을 넣으면서 하면 될테지요.
퍽 오랜만의 공연이네요.
아이들과 계자에서 보낸 ‘우리소리, 우리가락’ 시간이
그래도 잊히지 않도록 한 연습의 시간이 돼 준 셈이었겠습니다.

밤은 깊은 동굴 속으로 달려갑니다.
거기 더 깊은 어둠이 있지요.
그렇게 동지까지 달려갈 것입니다.
그러면 다시 해는 노루꼬리 만큼씩 길어져갈 테지요.
분명코 봄이 오리라는 진리는
모진 겨울의 산골을 보다 쉬 나게 합니다.
쥐구멍에도 볕 뜰 날이 있다는
고단한 삶의 희망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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