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2.22.달날. 맑음
푹하고 달콤한 바람 살랑입니다.
수선화 싹이 오르고 있었지요.
쇼팽 탄생 100주년 기념이랍니다.
라디오에선 종일 그의 피아노곡들을 들려주고 있었습니다.
보건소에 나갔습니다.
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면소재지에 가려니
마침 보조하는 간호사가 교육을 갔다는 전화 안내였지요.
읍내까지 갑니다.
치과진료는 월수금이란 걸 기억하고 갔는데,
거기도 마침 출장이라네요.
시골 사니 이런 일 맞추기가 쉽잖답니다.
지나간 다큐멘터리영화 하나 챙겨보았습니다.
최하동하의 <택시블루스>.
‘택시’와 ‘블루스’보다 ‘서울’과 ‘묵시록’에 가깝다는 연출의 변처럼
택시를 몰며 그가 택시 안과 밖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건 '서울'이었지요.
그 서울은 밤이 더 서울답습니다.
그로테스크하지요.
2003년 8월 당시,
서울에는 2만여 대의 법인택시와 4만여 대의 개인 택시,
그렇게 7만여 대가 시내를 달렸습니다.
보통 12시간 근무, 주야 2교대,
하루 2-30회 승객을 태워야만 8-10만원의 사납금을 채웠지요.
그런 열악함은
현대판 노예제를 철폐 하자고 분신자살을 한 택시노동자를 낳기도 하였습니다.
택시를 몰던 감독은
차츰 수익금 올리는 방법을 익혀나갑니다.
자정 전후 택시 문을 잠그고 창문을 약간 열며 유흥가를 돌다
괜찮은 목적지를 외치는 승객에게만 문을 열지요.
“둘, 장거리라고 다 좋은 게 아니다.
다음 승객이 보장되는 강북 신촌 강남 논현동 에이급 코스 피크타임에...
셋, 심야에 노원구로 안 간다, 베드타운이니 필시 빈차로 나오니...”
그런데, 김선일의 피랍사건, 정은임 아나운서의 죽음, 한강투신 젊은이,
택시 안 라디오에서 흐르는 그 즈음의 소식들과 함께
그만 말문이 막혀버리는 장면이 이어집니다.
2004년 그 즈음이면 물꼬는 상설과정을 열고 정신없이 살아내느라
대해리 바깥 세상 이야기는 통 듣지 못하고 살던 시절이지요.
세상에, 서울을 하나님께 드리는 봉헌서라니!
'흐르는 역사 속에서 서울서 지켜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하심에
감사와 영광을 돌리며 서울의 회복과 부흥을 꿈꾸고 기도하는
서울 기독 청년들과 마음과 정성을 담아
2004년 5월 30일, 서울 특별시장 이명박 장로 외 서울 기독 청년 일동...'
돌아버리는 줄 알았다, 이럴 때 하는 표현 아닌가 싶습니다.
표지에는 서울시 공식 휘장까지 새겨져 있었지요.
그네들(?) 것인 서울은 참말 우울도 하였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