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10.19.물날. 맑음

조회 수 1042 추천 수 0 2011.10.30 09:38:26

 

겨울이 코밑이라는 소릴 겝니다.

딱따구리 겨울날처럼 나무를 쪼는 소리 건너오는 아침이었습니다.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의식(음... ‘의식’이 맞겠습니다)을 하듯

대배 백배로 해건지기를 하고 있는 요즘입니다.

그 앞뒤에 기본호흡과 선정호흡.

성찰과 참회가 수행의 시작이려니...

내 악덕에 참회하며 절하고 또 절합니다.

절하고 있으면 떠오르는 얼굴들을 위해서 또 절합니다.

암을 앓는 이, 방황하는 아이들, 자신을 끊임없이 못살게 구는 벗,

이국에서 공부하고 있는 제자들, 마음을 앓는 이들,...

마치 필름처럼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 떠오릅니다.

절하고 또 절합니다,

그 기운이 그에게 닿으리라 여기며.

수행에 공을 좀 들여야겠다는 서원이 생깁니다.

적당히, 헐렁하게, 가볍게...

뭔갈 쥐었다하면 지독하게 하며 자신을 몰아가던 젊은 날은

이제 이런 경향으로 변해 있지요.

조금 더 자신을 죄여도 볼 일입니다.

 

그런데...

초등 통합학급 지원을 마치고 나와 잠시 개천둑길을 걸었습니다.

마침 스님 한 분 만났지요.

언젠가 꽤 늦은 시간 김천 외곽으로 들어가는 버스 편이 없어

모셔다 드린 적이 있었던 인연입니다.

아무래도 요새 하는 수행이 자연스런 화제가 되지요.

몸으로 하는 수행, 그거 너무 믿지 마라,

그런 말씀쯤을 하셨습니다.

종교, 시대, 문화를 초월한 ‘통찰지’야말로 깨달음 아니겠냐셨지요.

글도 그것으로 쓰라셨습니다.

통찰지...

 

통합학급으로 출근하여

어제 아이들과 간식을 먹은 뒤 깜빡 잊고 싱크대에 남겨두었던

고구마 찐 냄비며 그릇들 부십니다.

행주질이며도 보조샘들은 하지마라, 마라십니다.

할 만하면 자신이 하는 게 젤 맘 편하다마다요.

어제는 학급 담임샘 흐름대로 충실하게 보냈습니다.

그러면 오늘은 슬쩍 내 흐름대로 해보면 어떨까,

그런 생각 끼어들었지요.

우리 학급에 무엇이 있나 알면 좋겠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교실탐방의 날?

좋은 교재들 좋은 교구들 많으니까 그것들 잘 쓰고 싶었던 게지요.

 

아이들이 일찍 내려옵니다, 단축수업인 듯합니다.

아, 오늘 직원극기훈련이 있다 했습니다.

한 산으로 등반대회를 간다했지요.

쉬는 시간 없이 움직입니다.

급식시간으로 시간표가 학년마다 차이가 있으니,

예전처럼 수업을 알리는 벨이 없는데다 시간이 이렇게 바뀌니

계속 시간 점검으로 바빴더랍니다.

 

아이들과 교구 가지고 같이 놀며

사부작사부작 아이들 둘러싼 환경을 묻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주고받는 얘기들을 통해 그들의 사는 형편을 짐작도 하고

그들이 처한 여러 어려움도 알게 됩니다.

이 시대가 정상의 범주이지 않을 때 얼마나 잔혹한가를 모르지도 않았으나

마음을 퍽 아리게 했습니니다.

아이들과 손가락인형놀이도 했지요.

친구들에게 들려줄 때, 같이 놀 때로 나누어 잘 아는 옛이야기로.

잘 아니 대사도 금새 익혀 재미났지요.

사내애들과 보드게임 ‘개구리멀리뛰기’도 신나게 했더랍니다.

 

점심을 먹고 느릿한 오후를 보냅니다.

“같이 가시죠?”

“저녁이라도 같이 드시죠?”

보조샘들만 등반대회에 보냈더랬지요.

오후에 들리는 두 아이만 학급에서 놀다 갔습니다.

“집에 바로 보내라던데...”

“그럼, 간식 없어요?”

둘은 냉장고에서 마실거리를 꺼냅니다.

요걸트와 함께 남아있는 고구마를 다 먹었지요.

그런데, 아이들은 참말 재미납니다.

자신을 포함한 둘 밖에 없는데도 이리 묻습니다.

“일요일날 런닝맨 본 사람?”

 

5시까지 일을 좀 하다 퇴근하기로 합니다.

문단속을 하려는 학교아저씨들의 채근으로 더 있기도 어려울 테지요.

쇠날 물꼬에 아이들 데리고 와 가을 하루를 노닐면 어떨까 싶었는데,

보조샘들도 적극 지지했더랬는데,

고민하다 결국 교감샘한테 말씀 안 드리기로 합니다.

공문을 올리고 하는 과정이 꼭 번거로워서만은 아니었지요.

아이들 데려나가겠다 하면 가지마라기도 그렇고

가라기엔 걱정이 많고 할 교감샘 마음도 헤아리느라 말이지요.

 

나이든 분들과 접점이 많은 가을입니다.

나이 많은 동료교사 한 분이 선물 하나 내미셨습니다.

“옥샘한테 꼭 어울릴 것 같아서, 지난번에 입었던 긴 옷이랑 딱이야...”

친구 분이 빚었다는 들국화 도자기 목걸이었답니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전하고픈 계절이지요.

제주도를 여행 중인 이에게서 날아든 문자,

제주도 풍광도 풍광이지만

언젠가 이 언저리에 찍은 ‘당신의 영혼을 닮은 은행나무’라며 보내온

눈부신 가을의 은행나무가 와락 안겼습니다.

그리고, 쌀쌀해진 날씨가 이름 모를 서글픔을 부른다는 한 어르신의 글월.

아,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서울 아파트에서도 그런 맘이 들기도 하구나,

산골 겨울 앞에서만 힘겨운 게 아니구나,

그런 생각 스며 위로가 돼주었더랍니다.

가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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