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11.17.나무날. 흐리다 밤 비

조회 수 1071 추천 수 0 2011.12.03 01:43:54

 

 

학교에서는 목공실 앞과 바깥수돗가 천막 앞길에

도랑을 만들었다지요.

옥상에 올라 말리던 무청도 정리하였다 합니다.

 

대배를 하면 백배는 꼭 했더랬는데,

그만 늦잠을 자버리지 않았겠는지요.

번번이 물날이면 늦은 밤까지 무리하게 일을 합니다.

그래도 그냥 나설 수가 없어 대배 열배로 시작한

경주 출장 숙소에서였네요.

출장에서 다녀오며 면소재지에서 귀농자모임.

인근 농사 소식은 늘 그 편에 듣고 있답니다.

몇 사람 밖에 참석을 못하였네요.

농사 일이 끝나면 한가롭겠다 하지만

사는 일이 또 그렇지가 않을 겝니다.

논밭에 매달려 지냈던 날들에 밀린,

줄을 선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 터이지요.

작년엔 갑자기 온 된서리로 감이 매달린 채 일찍 얼어버려

곶감이 흉년이었더랍니다.

하여 올해는 일찍부터 시작한 곶감농사이더니,

이런! 날이 그만 너무 따뜻해

깎아 매단 감들이 홍시가 되어 흘러내리고 있다지요.

상주에선 빚을 내 곶감농사를 크게 벌인 농꾼이

그만 목숨을 버렸다는 소식도 들렸답니다.

우울했지요.

늦은 밤 자비명상을 하며

세상 버린 그니를 위로합니다.

 

벗이 강제윤의 ‘부석사 가는 길’에서 몇 구절을 옮겨 보내왔습니다.

‘아침에 편하게 나올 수 있는 길을 두고 밤길을 나섰다. 어느 선방에서 밤늦도록 좌선을 했었다. 좌선을 끝내고 막 잠자리에 누웠는데 무언가 밀려드는 것이 있었다. 그토록 깊은 그리움이 나에게 남아 있었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사람이 아니라 어떤 장소가, 어떤 풍경이 그토록 간절히 그리웠던 적은 일생 동안 단 한 차례도 없었다. 나는 늘 길을 갈망했고, 길을 그리워했었다. 떠나지 못해 안달했었지 돌아가기 위해 서둘렀던 적은 결코 없었다. 집으로 돌아갈 시간만 되면 고통스러웠었다. 돌아감을 피할 수만 있다면 영혼이라도 팔아버리겠다고 결심한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데 집에 대한 그리움이라니, 이 터무니없는 그리움이라니! 이것도 내 마음이라 할 수 있는가. 이 믿기지 않는 마음도 정녕 내 마음이란 말인가. 돌아갈 집이 사라져 버리자 집이 그리워지다니! 동천다려의 그 서늘하고 고요한 아침이 그리웠고, 문틈으로 스며들던 겨울 햇살이 그리웠다. 봉순이와 어영이, 길동이, 꺽정이와 한가롭게 장난치고 놀던 시간이 그리웠다. 살아서 그들을 다시 볼 수 있을까. 그 순간으로 다시 돌아 갈 수 있을까. 그때는 순간순간마다 살아 있었다. 살아 숨쉬며 햇빛 속을 거닐던 날들. 이제는 결코 돌아갈 수 없는 시간들. 돌아갈 수 없는 아침과 저녁, 땅거미 지던 앞산이 그리웠다. 그리움에 견딜 수가 없었다. 그대로 미쳐버릴 것 같았다. 그 길로 배낭을 챙겨 산길을 내려왔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칠흑의 산길을 기어서 내려왔다. 산을 내려간다 해도 나는 결코 다시 집으로 갈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집이 그리워 견딜 수 없는 공간에도 머물 수 없었다. 대체 나는 왜 사라져버린 것들만을 그리워하는가. 떠나 온 집을 그리워하고 떠나간 사람만을 그리워하는가. 두 시간 동안 밤의 산길을 내려오며 문득 떠오르는 한 생각이 있었다. 그것들이 그리운 것은 되돌릴 수 없는 시간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돌아갈 수 없으니 집이 그리운 것이다. 다시 돌아올 수 없기 때문에 사람이 그리운 것이다. 아 어째서 나는, 사람은 그리움 속에 살지 못하고 마냥 그리움의 바깥에서만 사는가. 나는 다시 밤 열차에 몸을 부렸다.

자기 존재의 소중함을 확인 받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의 하나는 여행이다. 집에서, 일터에서 마을에서 나는 얼마나 자주 하찮은 존재인가. 고향 마을을 떠나오기 전 나를 하찮게

여기는 사람들 틈에서 나는 너무 오래 살았다. 거기 길들여져 나도 내가 하찮은 존재인 줄

알았다. 나도 자주 나를 하찮게 대우했다. 예수도 고향에서는 배척받았다는 경전 말씀을 떠올리는 것은 위로 받기 위함이 아니다. 잔혹한 삶의 진실을 깨닫기 위함이다. 집을 떠난 뒤에야 비로소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를 문득 문득 깨닫는다. 낯선 곳으로 여행을 떠나본 사람은 안다.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나는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 그러므로 어떠한 여행도 존재의 근원을 찾아 떠나는 구도 행 아닌 것은 없다. 움직일 기운이 남아 있을 때 자주 떠나야 한다. 모두가 여행자로 살수는 없으나 누구나 떠날 자유는 있다.

(중략)

기댈 것 없는 마음들을 떠다니게 만드는 사람살이의 고통은 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변하지 않은 듯하다.

...’

 

문득 사는 일이 처연(悽然)합디다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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