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탄이 들어왔습니다.
유난히 추웠던 겨울은 연탄도 여느 해 양으로는 아니 되었던 게지요.
하여 이 봄에 다시 천 장을 들여놓았습니다.
이 시대 정말로 열 손가락에 꼽을 수 있는 단어만으로 대화하는 여고생을 보고
어휘 수의 빈곤을 느끼는 어른이 어디 한둘이던가요.
저 상태라면 의사소통이 되기는 하는 걸까 갸우뚱거리게 되지요.
저들끼리도 상대가 무엇을 말하는지
상대의 마음속을 알고 있다는 생각이 도무지 들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한 老 철학자,
어찌 보면, 요즘 아이들이
일부러 오해의 여지가 있는 소통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지요,
그것이야말로 소통의 왕도이기 때문에.
열 개 남짓한 형용사로 이뤄지는 극도로 빈곤한 대화에 참가한 사람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서로 잘 모르겠는 상태이기 때문에
비로소 따라서 회화가 소통으로서 성립한다는 것.
그러니까, 오해의 여지가 없는 소통이 아니라
오해의 여지가 확보된 소통이야말로 우리가 소통하고 있음을 실감하게 한다는 이야기.
말이란 게 앞뒤 맥락이 있는 것이라 이렇게 달랑 말하자면
애초 들으라고 하는 말이 무슨 소리냐 되물어오기 십상이긴 하겠는데,
저 역시 어휘의 빈약함으로 인하야...
노 교수는 이어 이리 말합니다.
“이 극도로 빈곤한 어휘는 ‘말하고 싶은 것을 제대로 말하라’며 정형화된 자기표현을 강제하는 학교 교육에 대한 아이들의 반항이 아닐까. 학교 교육에서 쭉 옳다고 여겨온 방식으로는 소통이 불가능하다고 느낀 아이들이 일종의 자발적 실어증을 앓는 것으로 문 닫힌 소통을 회복하려 한다는 느낌이 든다.”
으음, 그럴지도 모른다는 공감.
바로 이 철학자의 대중서를 읽고 있는 중.
자크 라캉의 <정신병 下>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하는 장면이 있는 것은 일부러 그랬다고 말하기는 그렇습니다만 실은 명백한 의도가 있습니다. 이 오해의 폭에 의해서 여러분은 내가 말하는 것을 따라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즉 여러분은 불확실하고 애매한 위치에 멈춰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오히려 정정(訂定)의 길을 열어두고 있는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내가 만약 쉽게 알기 쉬운 방식으로, 여러분이 알았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진행한다면...... 오해 따위는 생겨날 리 없겠죠.’
이 말은 어떤 의미에서 소통에 관련된 우리의 상식을 통째로 뒤집고 있습니다. 하지만 소통의 본질을 이만큼 예리하게 파악하고 있는 말은 세상에 또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통찰력이 풍부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소통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 것은 거기에 ‘오해의 폭’과 정정(訂定)으로의 길’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오래 오늘 곱씹고 있는 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