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2.27.물날. 맑음

조회 수 754 추천 수 0 2013.03.09 05:26:22

 

 

봄입니다. 영상으로 올라간 기온.

마을은 쥐불을 놓습니다.

둑의 마른 잡초들을 다 태웠지요.

우리도 닭장 뒤란 죽의 마른 잎들을 다 태웠습니다.

 

겨우내 끼고 있던 책 한 권,

별로 길지도 않은 소책자로

마음먹자면 꼼꼼히 읽더라도 불가에서 너댓 시간이며 족할 것인데,

물론 그 깊이로 보자면야 두툼한 철학책에 다름 아니겠지만,

처음엔 흔하디흔한 방식의 지적담론 하나이군 하다가,

그러니 더 바쁘게 읽어내야 할, 혹은 더 흥미로운 책에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다,

반납 기일이 다 돼 돌려보내려니 또 아쉬워 빌려왔다가

또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고,

어쩌다 책상 앞에 앉아 두세 장 넘기고,

그러다, 어, 중반을 넘으며 심상치가 않아지는 겁니다.

아마도 이 책에 대해 한결같이 느낄 법한,

‘내가 옳다고 주장하는 지(知)가 아니라 내가 틀린 것은 아닐까라고 의심하는 지(知)’

쪽에 서 있다는 느낌,

내가 말하는 것만이 옳다고 말하는 숱한 그 옳음에 넌덜머리가 난 이에게

이건 얼마나 매력적인지요.

결국 스승과 제자의 관계, 혹은 배움에 대해 말하지만

궁극적으로 사유에 대해 말하고

삶에 대한 자세를 말하고

그리고 마침내 길을 제시하기에 이르는.

너무 나갔나요?

모든 흔들림이 결국 그런 길로 가게 되지 않던가요.

그러니까 우리를 흔들어주는 책.

그래서 반가웠네요. Hi!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따라가 보는 것이야말로

가장 이 책의 의도에 가까운 것이겠지만, 당연히,

그가 말한 배움에 대한 말 한 마디를 굳이 옮길라치면,

모국어를 배우기 시작할 때 아이는 ‘말’이라는 게 무엇인지 아직 알 리 없는데,

학령기가 되니 우리말을 제대로 배워야지 하고 배우는 게 아닙니다.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는 엄마의 말을 아직 모르지만

이미 말에 의한 소통의 현장에 통참하고 있지요.

아이가 태어나기도 전에 언어는 이미 성립되어 있었으니

그의 탄생은 언어보다 절대적으로 늦을 수밖에요.

이미 게임은 시작되었고, 아이는 규칙을 모른 채 게임에 강제로 참가한 셈.

그럼에도 아이는 머잖아 말의 의미를 하나씩 발견해갑니다.

그것은 말에 의미가 있다는 것을 가르쳐줬기 때문이 아니라

음성이 어떤 것을 기호로 대리 표상한다는

‘말의 규칙’을 모른 채 말 속에 던져지기 때문이라는 것.

이 프로세스의 경이로움은

규칙을 모르고 게임을 하는 중에 규칙을 발견한다는 역설에 있다지요.

아이가 사람들의 음성이 의미를 전달하는 기호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뜻도 모를 음성을 듣고 이게 뭔가를 전하려는 게 아닐까, 하고 물음을 던졌기 때문.

이것이 바로 모든 배움의 근원에 있는 질문던지기.

배움의 모든 여정은 질문을 던질 수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 있다는 겁니다.

“똑같은 수수께끼 게임에서 장량은 장량의 규칙을 발견하고 나는 ‘나의 규칙’을 발견합니다. 똑같을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아니 같아서는 안 됩니다. 배움의 풍요로움은 누군가에게 배움을 얻어낼 수 있는 식견이 배우는 사람의 수만큼 존재한다는 것을 담보로 하니까요.

‘당신은 그렇게 함으로써 나에게 무엇을 전하고 싶은가?’하는 물음을 던질 수 있는 상대방이 있는 한 배움은 무한으로 열려 있습니다. 우리가 인간으로서 성숙할 수 있는 가능성은 오직 그 점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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