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오, 오늘 선곡 좋은데!”
아이들이 홀리 니어와 피터 폴 앤 메리의 음반을 걸었습니다.
음반이 많지 않아서도 그렇겠지만
잔잔하고자 하는 전체 분위기를 어그러뜨리지 않는 노래들을
잘 골랐더이다.
해건지기 뒤 아침의 찻상 앞에서였습니다.
오전은 상담과 학습이 있었고,
모종판에 호박과 단호박과 오이와 옥수수와 수세미를 심었습니다.
4.19.
그렇다고 그리 역사적 의의가 있는 일은 아니고
일 하나 있어 서울행.
아이들의 점심 밥상을 챙기고 부랴부랴 나서고,
아이들은 저들끼리 오후 노동을 하고
이른 저녁들을 챙겨먹고 달골에 걸어 올랐다지요.
새벽 2시 대해리로 들어옵니다.
...
나는 그날 이후 영영 달라졌다. ...그날의 나를 해명하기 위해 살아왔다. 그 웃음을 떠올리면 나는 아무리 나쁜 것도 마냥 나쁘게만은 보이지 않고, 제 아무리 아름답다는 것도 마냥 아름답게는 보이지 않게 되었다. 자신이 받은 알량한 상처의 총량을 빌미로, 타인에게 가하는 상처를 아무 것도 아닌 양 무마해버리는 비겁함을 쉽게 감지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모두 상처받으며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인생이 영화나 연속극이라도 되는양 타인과 자신의 삶을 극화하는데 익숙한 사람들은 그 상처를 계기로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거나, 최소한 보상받으리라 상상한다. 내 상처가 이만큼 크기 때문에 나는 착한 사람이고 오해받고 있고 너희들이 내게 하는 지적은 모두 그르다, 는 생각을 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그런 착각은 결국 응답받지 못한다. 상처는 상처고 인생은 인생이다. 상처를 과시할 필요도, 자기변명을 위한 핑계거리로 삼을 이유도 없다. 다만 짊어질 뿐이다. 짊어지고 껴안고 공생하는 방법을 조금씩 터득할 뿐이다. 살아가는 내내 말이다.
그러고 보면 사람은 연민만 아니라면, 자기혐오로도 충분히 살 수 있다. 물론 사랑으로도 살 수 있겠지만 그건 여건이 되는 사람에게 허락되는 거다. 행복한 사람들이 모두 행복하세요 사랑하세요, 같은 말을 떠벌이며 거만할 수 있는 건 대개 그런 이유에서다. 나는 별 일 없이 잘 산다.
오늘은 스스로 표류를 선택한 20대의 글 하나를
표류하지 않으려 애쓰는 20대를 위해 전함.
그런데 그것이 20대를 위한 것만이 아니더이다.
원하지 않으나 표류하는 10대와
꿈같은 건 꾸어본 적도 없는 30대와
자기 연민 강한 40대 벗들에게도 필요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