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러져도 달빛 넘칩니다, 숲길.
나무 사이로 은혜로운 우주의 은총처럼, 아니 은총으로 내립니다.
추분, 이제부터 밤이 더 길어질 것입니다.
그토록 덥네 마네 해도
밤과 낮의 길이는 아직 온전한 질서로 가고 있습니다.
학교에서는 연일 뒤란의 밤을 줍고 있습니다.
겨우내 우리 아이들의 주전부리가 되어줄 것입니다.
밤색...
우리는 그 껍질색을 그리 부릅니다.
여름 볕의 직선은 밤톨로 모여 색을 그리 이루었습니다.
살구색, 복숭아색, 딸기색, 오렌지색, 하늘색...
사물의 색이 그 사물로 이름이 지어져
사람들 사이에서 그 색깔을 공유토록 했다는 사실이
새삼 언어의 사회성에 대한 이해로 오데요.
아이가 웬만큼 자라니 부모가 더욱 여유롭습니다,
그렇다고 그간에 다른 부모들 애쓰듯 한 것도 그리 없지만.
자네는 자네 삶을 살고 나는 내 삶을 살고,
그리 입버릇 되었지만 그래도 어릴 땐 마음이 쓰이더란 말이지요.
헌데 최근 아이는 자기 삶을 앞에 놓고 홀로 분투하고 있었고,
격랑의 시간을 보내고 서서히 자리를 만들며 안온을 얻어가고 있었습니다.
하기야 우리가 아이의 바다를 어이 알까요,
무엇을 장담할 수 있을까요만.
오랜만에 아이와 함께, 이제 아이라기엔 성큼 자라버린,
그 아이 필요한 것들을 같이 챙겼습니다.
북한강에도 가서 잠시 놀았지요.
강의 뛰는 물고기가 우리의 가을 들머리를 더욱 생기 있게 하였습니다.
청평에서 홀로 서울집을 향해 전철을 타고 가는 아이를 멀리서 봅니다.
아이도 제 삶 속으로, 어미도 자신의 삶 속으로 걸어갔습니다.
피아노를 막 배우기 시작한 한 성인의 하소연.
어깨가 아프다지요.
모든 일이 그렇듯 피아노 치는 것도 힘을 빼야 합니다.
익숙해지면 그런 순간 오겠지요.
하기야 몰라서 어디 힘이 들어가나요.
서툴 때, 그러니까 익지 않았을 때 그런 것.
삶도 그럴 겝니다.
우리가 익어진다면 힘이 덜 들어갈 테지요.
아직도 힘이 들어가서 뻐근하다면
삶에 서툴러 그럴지니.
하기야 죽는 날에 이른들 익어지기는 할지.
다시 나무다루는 현장 들어옵니다.
첫 밤.
숙소에서 집에서 싸온 것들로 소박한 밥상을 차립니다.
사람 사는 데 그리 많은 게 필요하지 않듯
먹는 것 또한 그렇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