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4.15.불날. 맑음

조회 수 700 추천 수 0 2014.05.15 03:41:16


아침 수행을 끝내고

옥수수와 호박 모종에 물을 주며 아침을 엽니다.

가마솥방도 책방과 교무실에 이어

드디어 난로를 치웠습니다.

겨울을 이제야 보낸 것 같은.


물꼬도 몇 해 포도농사를 지었습니다.

즙을 짜기도 했지요.

포도밭을 패 내고 더는 포도즙 짜는 기계를 쓰지 않았습니다.

2004년에 사서 두어 해 쓰고 창고를 지키고 있는 거지요.

수확량이 많지 않았던 두어 해는 밖에 의존하여 즙을 짰으니.

언제부터, 꺼내서 팔든지 주든지 해야지, 그렇게 해가 가고 또 갔습니다.

얼마 전 물꼬에 들린 면소재지 한 벗,

고물상 보내기 아깝다며 나서서 저가 팔아야겠다더니

드디어 임자 나섰다는 소식.

늘 적절한 때 적절한 손발들이 그리 살림을 살아주고 혹은 보태줍니다.


<시골은 그런 것이 아니다>(마루야마 겐지).

"주변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이성으로 생각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교양, 지성이다.”

바로 그 마루야마 겐지.



‘당신은 진정 홀로서기를 한 사람입니까. ...

부모에게 의존하고, 학력에 의존하고, 직장에 의존하고, 사회에 의존하고, 국가에 의존하고,

가정에 의존하고, 술에 의존하고, 경제적 번영의 시대에 의존하면서 이럭저럭 수십 년을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홀로 설 기회를 그때마다 잃고, 그저 공부나 일을 하면서 겪은 혹독함 정도로 인식하고 있을 뿐입니다.

사실 당신은 자신에서, 세상으로부터 도피하고 또 도피해 온 것은 아닐까요. ...

그래서 직장이라는 후원자를 빼앗긴 당신은 자신의 판단만을 강요받는 진정한 어른의 처지로 내몰리자 그런 어린애 같은, 너무나 허술하기 짝이 없는 발상에 휘둘리고 만 것은 아닐까요.’(p17~18)



시골생활 47년째인 그는 목차에서부터 냉혹합니다.

평온하고 고요한 삶이 시골에 있으리라 환상을 품은 사람들에게

불편하기 짝이 없는 시골의 현실을 일깨우지요.


물꼬도 이른바 귀농인으로 분류되는 ‘외지 것’입니다.

1996년 가을부터 폐교가 된 학교를 썼으나 서울과 왔다갔다 하다

2001년 비로소 식구들이 아주 이사를 왔지요,

저야 그 해 네 살짜리 아이 손을 붙들고 한국을 떠나

일곱 개 나라 공동체를 돌아 2003년 여름에야 들어왔지만.

도시로 나간 아비의 자식이 이 마을에 산 적 조차 없어도,

그 자식은 이 마을 사람이어도

2001년부터만 따지더라도 벌써 십년도 한참 넘은 세월을 산 외지 것은

여전히 외지 것입니다,

아마도 한참을 더 살아도 그럴.

차례만 몇 훑어보아도 거개가 다 겪은 것들이지요.

엊그제도 겪었을.



어떻게든 되는 시골 생활은 없다

어딜 가든 삶은 따라온다

경치만 보다간 절벽으로 떨어진다

스스로를 속이지 마라

풍경이 아름답다는 건 환경이 열악하다는 뜻이다

텃밭 가꾸기도 벅차다

구급차 기다리다 숨 끊어진다

당신의 가난은 고립무원이다

고독은 시골에도 따라온다

고요해서 더 시끄럽다

다른 소리를 냈다간 왕따당한다

친해지지 말고 그냥 욕먹어라

윗사람이라면 껌뻑 죽는다

심심하던 차에 당신이 등장한 것이다

돌잔치에 빠지면 찍힌다

이주자들과만 어울리면 사달 난다

엎질러진 시골 생활은 되돌릴 수 없다



그렇습니다. 정말 ‘시골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텃밭 가꾸기도 벅차’고,

‘시골은 그런 것이 아니’라는 대목을 날마다 경험합니다,

그러면서, 누구 말마따나 하루에도 열두 번 암울하고

겨우 한 번이나 희망을 느끼는.

그래도 마지막 한 줄의 위로!


진정한 빛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만 빛납니다.

진정한 감동은 현실의 고단함 속에서만 만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물꼬도 계속 이 산마을 산다는...

그리하여 물꼬가 계속 살아간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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