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어제 들어왔던 벗과 아이가 마늘 수확을 도왔습니다.
이번 주 위탁교육 끝날.
여느 주라면 달날 시작해서 흙날이 마지막일 것을
이번 주엔 해날을 시작으로.
오후, 아이와 함께 서울행.
내일의 섬모임에 맞춰 짜진 일정이랍니다.
우리는 쉬지 않고 달렸고, 아이는 네 시간 내리 잠을 잤습니다,
그간의 피로이거나 가는 날들에 대한 부담이거나.
마음이 짠해졌지요.
여기서 지내는 것도(게임도 못하고 tv도, 고기도 없고 일도 해야 하지만) 괜찮겠다는 아이의 말이
다 산 사람의 마지막 말처럼 쓸쓸도 하여,
도시로 보내는 것이, 자신의 일상으로 다시 돌려보내는 것이
마치 등 떠밀어 시집보내는 딸 같기라도 하여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한 학기, 한 달, 하다못해 2주만이라도, 그렇게 신청해왔으나
이곳 사정이 여의치 않아 겨우 1주 배정.
미안합니다...
하지만 사랑 넘치는 아이의 어머니 계시니...
‘여기서 외로움을 달래주는 건 장순이, 책, 축구공이었다. 평소엔 거들떠보지도 않던 것이다.
셋째 날 아침 새의 소리가 너무 좋았다.
...난생 처음 손빨래도 해보았다. 나 꽤 잘하는 듯.
... 세월은 참 빠르다. 여기 온 게 엊그제 같은데 에휴 여기서 느낀 걸 도시가서도 똑같이 하는 모범맨이 되면 좋겠다.’
아이는 갈무리글에 이렇게 쓰고 있었습니다.
‘나는 나다. 앞으로 나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삶은 구호에 있지 않습니다만
계기는 될 수 있지 않을지요.
“제가 ADHD이잖아요.”
아이가 예비상담에서 꺼낸 첫마디였지요, 아마.
우리가 장애진단에서 늘 우려하는 ‘낙인’...
타인으로부터 손가락질 받거나, 스스로 이미 자신의 한계를 규정짓는.
예, 아이는 그 흔한 ‘주의력결핍 및 과잉행동장애’아입니다.
의학의 발달은 우리의 병도 더욱 세분화하여,
과거 우리가 좀 별나다고 했을 뿐인 아이들이
이제는 모두 병명을 얻고 있습니다,
소아정신과는 문전정시를 이루고.
적지 않은 아이들이 정신질환을 앓게 되었을 수도 있고
진단 기술이 더 정교해진 측면도 없지 않겠지만
의학과 의료행위에 미치는 제약업계의 영향력이야말로
1980년대 이후 어린이 정신장애를 늘이고 약물치료를 급증하게 했을 것.
하버드대 소아정신과 권위자 조지프 비더먼이
소아 우울증의 경우 약물 치료가 효과적이라 주장하자
그 진단과 치료가 40배나 증가했다던가요.
그는 제약회사와 돈독했고
제약회사가 유리한 연구결과가 나오게 하겠다고 약속하고 지원을 받았던 인물입니다.
다루기(이건 또 얼마나 웃긴 표현인지) 힘든 아이들은 무차별적으로 ADHD가 됐고,
그렇게 우리 아이들은 약물치료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돌봄의 대상이 아니라.
어디 의학계만 그러할지요.
낙오자 없는 교육을 한답시고 일제고사를 실시하고,
그리하여 이 변방 면소재지 초등학교 아이들도 밤 10시까지 시험공부를 하고,
시험 출제업계는 배불뚝이가 되고...
‘거대 기업이 이윤을 창출하려고 어린 시절을 무자비하게 압박하는 사회’에서
우리 아이들을 살리는 길은 정녕 무엇일지요.
기업사회의 실상을 직시하고 시민으로서 사회를 바꾸려는 집단적인 노력!
곧 민주주의에 동참할 때만 변화가 가능함은
굳이 <기업에 포위된 아이들>의 조엘 바칸의 지적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짐작하기 어렵지 않은 일이겠습니다.
사회가 아이를 대하는 방식만큼 그 사회의 정신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도 없다,
넬슨 만델라였던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