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꼬에 보태주는 이야기 하나 하나가 누추한 삶을 견디는 힘이 되어 주고는 한다.
삶의 의욕이라 불러도 좋을.
겨울 준비에 바쁠 손을 멀리서 아이고 어른이고 걱정들 해주었다.
소설(小雪)엔 무지개도 땅 아래로 숨어든다는 말은 어디서 유래한 것일까,
빚을 내서라도 추위를 한다는 소설이었으나 비만 내렸다.
소설 전에 김장을 하기 위해 바빴던 손길이
이맘 때 여러 가지 월동 준비를 위한 잔일로 서두르는 절기.
시래기를 엮어 달고 무말랭이와 호박을 썰어 말리고,
옛적엔 목화를 따서 손을 보기도 했다지.
겨우내 소먹이로 쓸 볏짚을 모아두기도 하고.
달골 단도리도 서둘렀다.
창고동은 겨울 한 철 문을 닫아건다.
수돗물을 차단하고, 변기의 물들을 다 빼두고, 창문을 여미고.
겨울짐도 교무실로 내렸다,
눈이 내려 길이 험해지면 달골 오를 일이 없도록.
예전 같으면 11월 보름께면 할 것을 푹한 날씨에 그만 게을러져 이제야.
이웃마을 유기농장 광평에 들러 김장 일정을 의논하다.
올해도 우리 배추는 그 댁 밭에서 컸다.
“우리는 벌써 했어. 물꼬는 언제 할 거라?”
예년보다 한 주 일찍 하기로 한다.
12월 첫 주말에 해오던 걸 11월 마지막 주말로.
“그건 나중에 써.”
나무날 트럭을 빌려 배추를 실어오겠다 하자
그 손을 나중에 아쉬울 때 쓰라며 조정환샘이 실어주겠다셨다.
“아니 그럴 게 아니라 그냥 여기 소금물에 절여 가져가.”
일은 또 그리 흘렀다. 쇠날 그곳에서 절이기로 한다.
김장은 배추절임이 반이라.
마을의 한 형님 댁에서 찾았다.
“내가 갖다가는 못 주고...”
뭘 좀 챙겨가란다.
김장이며 일을 죄 벌여놓고 계셨다.
“늘 일을 보고도 손도 못 보태네...”
지나간 여름엔 아이들과 요리에 잘 쓰라며 자주고구마를 챙겨주시더니
이번엔 또 ‘자주무’다.
“이것도!”
단감 좋아한다고 오늘 따왔다며 한 보따리 나눠도 주시고,
언제나 실한 파를 탐내는 눈을 위해 또 한 아름 대파를 뽑아주셨네.
교육청 일도.
자유학기제 페스티벌은 진로 축제로 가닥이 잡히고
몇 곳 섭외 전화가 오갔다.
지원팀장이란 이름을 걸었으나 사실 별 하는 일 없다,
전담 코디네이터가 있기도 해서.
제주도 올레길을 걷던 벗이 귤과 옥돔을 보내왔다.
지난해 여름 아일랜드에서 달포를 보냈고,
그때 벗에게 보낸 몇 줄의 글이 있었다.
‘연연하다는 과거에 연연하지 마라에 쓰이는,
집착하여 잊지 못하다 하는 자동사이기도.
하지만 연연한 정을 품다는 문장에서처럼 애틋하게 그립다는 형용사이기도 하다.
내 그대를 연연하노라, 오늘.’
여차했네.
자기연민으로 괴로운 순간이 있다.
자기애가 강한 것도 문제지만 자기연민이 지나친 것도 문제.
스스로 가련한 자기연민주의자는 타인에게 끊임없이 상처를 준 자신은 잊고
정작 타인으로부터 받았던 상처만 기억한다.
그래서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하고,
그리고는 더욱 더 불행해진다.
나아가 불행을 통해서 자기 삶의 서사가 완성되는 순간까지 불행을 잡고 늘어지고,
심지어 불행을 더 편안해하기까지 한다.(자신이든 자신을 둘러싼 이들이든)
그런데, 그것 또한 다른 형태의 인정욕구, 혹은 외침 아니겠는가, “나 여깄어!” 하는.
자기애와 자기연민 ‘사이’(중간 정도의 의미로) 어디쯤에 우리 자리가 있으면 딱 좋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