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아침을 맞으려 산에 드는가, 그런 아침을 맞았다, 삼도봉에서.

산은, 한 번도 보여준 적이 없는 모습으로 눈앞에 섰다.

아, 아, 아, 탄성 한 마디 외에 어떤 말도 할 수 없게 하는 풍경이 펼쳐졌다.

겹겹이 산이 이어지고, 그 산과 산 사이 사람의 마을들이 도무지 있을 것 같지 않은 풍광.

유리 슐레비츠의 <새벽>에 나오던 수채화를 떠올렸고,

호숫가나무 아래 할아버지와 손자가 물을 긷던 모습으로

삼마골재 쪽으로 왕복 2.5km를 걸어 물을 떠왔다.

산에서는 본류가 아니라 지류에서 물을 얻으라던 선배의 말을 배웠다.


엊저녁 7시 30분 민주지산 아래 황룡사에서 출발한 산오름이었다.

산에 가겠느냐는 선배의 문자가 닿아 있었지만

책상 앞에서 씨름하던 일들을 끝내지 못해 답을 미루다 저녁이 되었다.

삼도봉에서 비박을 한다던 선배였다.

가자, 가야겠다, 가야만 한다, 그렇게 부랴부랴 짐을 쌌다.

야간산행은, 그것도 겨울의, 당면한 문제를 대면하는 방법이었는지도 모른다, 고행 같은.

깊이 사랑하는 한 사람을 떠나보내야 하는 고통스런 일이 있었고

(황망하게 세상을 버린 선배에서부터

도대체 가을겨울을 얼마나 지독하게 사람들을 보내고 있는가),

지난여름 일정에서 남은 일을 이 며칠 안에 해결해야하는 숙제도 있었다.

그렇더라도 모르는 산이라면 엄두를 낼 수 있었으려나,

나, 민주지산 산지기라 스스로 부를 만치 수십 차례 오르내려온 산이었다.

(삼도봉-석기봉-민주지산-각호봉으로 능선 이어진다)


큰 배낭이 다른 집에 가 있어 학교아저씨 배낭을 빌리고,

마침 계자의 산오름에서 남아있던 핫팩이며들이 있었고,

선배들이 남겨주고 간 산행용 식량도 있었다.

사랑하는 벗이 사준 히말라야라 부르는 훌륭한 점퍼도 넣고,

겨울 침낭이 산행용이 아닌 캠핑용이라 부피가 컸으나 꽁꽁 여며

배낭 위에 맸다.

지난번 제주행에서 혹 한라산을 오를까 챙겨두었던 아이젠도 눈앞에 있었고,

헤드렌턴도 무사 작동.

혹 무슨 일이 생길까, 누군가에겐 연락을 해두어야겠다 생각했고,

문자를 보냈다. 이 산 특전사도 삼킨 적 있으니.

주차장엔 선배의 차로 짐작되는 한 대의 차만 덩그라니 있었다.

날은 겨울밤이라기엔 그리 춥지 않았고, 맑은. 다행한. 그리고 고마운.


이 산길, 아이들과 얼마나 여러 차례 올랐던 길인가.

눈을 감고도 가겠는.

산에 들면 머리에서 숨어있다 두 갈래로 나와 움직이는 내 더듬이는

더욱 예민하게 움직였다.

산에 살아도 산이 그리운, 평지보다 산에서 걷는 걸음이 더 편한.

잠시 다리쉼을 하며 올려다본, 잎을 떨군 우듬지 사이 하늘에는

별이 달처럼 밝고 촘촘했다.


어! 쉬면서 꺼두었던 헤드렌턴이 켜지지 않는다. 오른 지 40여 분.

아! 전화기가 있었지. 불통지역이었지만 다른 기능은 정상.

전화기 등에 기대 다시 올랐다.

귀신이 나오면 물으리라, 볼 일이 있어 찾아왔을 것이니.

걷는 동안 내 뒤에 모든 것이 같이 일어나 걸었다, 나무가, 물이, 돌이.

고라니 너구리들이 걸었을지도. 멧돼지는 사양함.


앗! 다리를 쉬고 다시 걷기 시작하려는데, 이제 전화기마저 꺼져버렸다.

몇 시나 되었을까, 손목시계도 차지 않고 나왔네.

곧 눈이 어둠에 익어지고, 별빛이 길을 비췄다.

삼마골재 계단이 시작되는 곳. 정상까지 1.5km 정도라는 뜻이다.

여기서부터라면 길을 잃을 염려도, 그리고 돌부리에 채일 일도 없다.

끝까지, 아니 끝의 몇 십 미터만 빼고, 계단이니.

한 발 한 발, 그 길 끝에 삼도봉 있으리라.

어디로든 끝에 이르리라.

수행자처럼 오직 걸었다. 달래 또 무슨 일을 할 수 있었으랴.


생텍쥐베리의 <야간 비행>을 생각했다. 리비에르의 목소리가 들렸다.

‘인생은 온통 모순 덩어리다. 그저 할 수 있는 한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영원히 계속된다는 것, 창조한다는 것, 자신의 덧없는 육체를 무엇과 바꾼다는 것은......’

책의 마지막 구절도 맴돌았다.

‘승리니......패배니...... 이런 말들은 아무 의미도 없다. 생명이란 더 값지고 더 단순한 것이다. 리비에르가 겪은 패배는 어쩌면 진정한 승리에 가까워지는 하나의 약속인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앞으로 전진하는 일뿐이다.

..... 리비에르는 그의 엄한 시선 아래 고개를 숙인 사무원들 사이를 지나 천천히 걸어서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왔다. 위대한 리비에르, 고된 승리를 짊어진 승리자 리비에르였다.’


선배는 어딨는가, 어디쯤이 그의 비박 장소인가.

다음 걱정은 다음 걸음에!

다시 오르니 저 꼭대기 즈음에 불빛 아른거린다. 헬기장쯤이겠다.

삼마골재에 이른다. 0.9km만 가면 정상.

100여 미터 오르자 얼음더미, 아이젠을 주섬주섬 꺼내 신는다.

그 참에 두리번거리니 저 멀리, 그것도 아래쪽에 웬 불빛. 왜 아래일까?

소리가 닿을 법하다.

“어이!”

“옥선생?”

원활하진 않아도 의사를 전할 만은 했다.

물이라도 길으러 간 게 아닐까 짐작해본다.

정상을 향해 계속 오르면 될 일이겠다.

4.4km 끝에 삼도봉이 나타났고, 더는 어찌해볼 도리 없이 바람을 피해 안내판 곁에 섰다.

곧 선배 나타났다.

“사람 소리는 나는데 불빛은 안 보이고...”

“다 꺼졌거든.”


밤길인데도 불도 없이 두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올 줄 몰랐단다.

낮에 닿으면 같이 준비해서 산에 들고, 아니면 내려가면서 물꼬 들리려했더란다.

일찍이 선배한테 겨울 비박을 하고 싶다 했다.

잊지 않고 그리 와준 그니였다.

“사람 있는 줄 아니 올랐지.”

그렇지 않았으면 어찌 야간 산행을 꿈꿨을까.

(나중에 다른 선배한테 호되게 야단맞았네.

 산에 부른 사람도 올라간 사람도 무모했다고.

“부른 게 아니고 내가 간 거야.”)


새벽 네 시까지 삶을 이야기하다.영하 18도. 더 낮았을지도.

바람도 어찌나 자주 나무 사이에서 말참견을 하던지.

그의 깊은 경청은 그대로 위로였다.

편이 돼주는 일, 앞뒤가 무슨 상관인가, 잘잘못이 다 무엇이냐, 그저 지금은 네가 옳다,

때로 그런 시간이 필요하다.

아침 햇살 퍼져서야 전화기도 렌턴도 얼어 꺼졌음을 알았다.

또 배웠네.

잠자리는 추웠다. 많이. 그나마 선배가 에어매트를 내준 덕분에 좀 나았으련만.

핫팩은 왜 좀 더 못 챙겼대나.

“옥선생 침낭이 허리 부분 충전을 해야겠더라.”

그랬던 거다.

햇살 퍼질 때까지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화창했다. 고마운.

길어온 물로 밥을 해먹고, 노닥거렸다. 산 아래 일은 산 아래 가서 하기.

아침수행도 잊지 않았다. 몸을 풀고 티벳 대배 백배, 그리고 명상.

무슨 귀한 일을 했다고 이런 순간을 내 삶에서 맞는가.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시간이었다.

하늘에 경외, 산에 사는 존재들에 경배, 평화를 위한 기도.

사랑하는 사람을 또한 생각했노니.


삼도봉에서 석기봉 쪽으로 능선을 타고 1km를 걸어

남은 이는 계속 진행방향으로 가고,

은주암골로 내려서다.

내 사랑하는 벗들과 지지난 여름 끝물에 걸었던 길이다.

티벳으로 가는 길, 이라 이름해도 좋을.

골짝으로 내려서면서부터 신은 아이젠은 한참을 더 달고 있어야 했다.

오는 여름에 아이들과 걸을 길을 가늠해보기도 했네.

짧다는 까닭으로 민주지산 지름길로만 여러 해 올랐더랬다.

2.3km 내려와 미리니골과 합류하는 지점에 이르고

어제 올랐던 그 길을 타고 내려오다.

해가 기울고 있었다.

(오는 23일 물꼬에서 하는 '발해 1300호 18주기 추모제'의 둘째마당은 삼도봉 산오름,

 사전 답사한 셈 되었네.)


살아왔고(뭐 그렇게 대단할 것도 아니지만 마음이 그리 결연했더라는),

삶은 계속된다.

학교로 돌아와 막 찾아든 손님 한 분 저녁 밥상을 차려 보내드리고.


달날 아침수행을 끝내고 계자 뒷정리를 돕던 연규샘이 돌아가고,

어제 대체의학요법으로 치료를 도운 윗마을 아저씨 한 분이

답례로 차린 유부초밥을 맛나게 먹었더랬네.

한 신문사의 기자가

뒤늦게 르포를 쓰고 싶은데 그만 계자를 놓쳤다고

물꼬 일정들이 어찌 되는가 물어와 길었던 통화도 있었고나.

여름계자에 동행하기로 했다.

지난여름 일이 아직 끝나지 않은 문제 있어 고심하며

요 며칠 안으로 입장을 정리해야 해서 여러 곳과 한 연락도 있었지.

그러고 부리나케 올랐던 야간산행이었다.


다시 삶이 앞으로 가고, 그 삶을 타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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