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려서 춥기 더한 아침이었다.
느리게 아주 느리게 아침이 기어오고 있었다.
그의 행적을 좇았다.
그로부터 꼭 아홉 해가 흘렀다.
2010년 11월 11일,
그날 내가 쓴 날적이의 일부는 이러했다.
‘이레 단식 뒤 보식 나흘째였던 그날,
어느 젊은 교수님으로부터 뜻밖의 선물을 받았습니다.
깊은 사유와 성찰의 시간, 단식(보식 포함)기간이어
더 뜻깊게 다가온 선물이었던 듯합니다
밑줄 그어진, 귀퉁이가 여러 곳에 접힌, 읽힌 흔적이 그대로 드러나는,
막 다 읽고 책을 덮은 지 얼마 안 된 따끈따끈한 책!
학창시절 아끼는 제자에게 건네주셨던 은사님들의 선물이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저 역시 그런 선생인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저는 잊었으나 초등 6학년이던 한 녀석에게 건넸던 책 한 권이
그 아이의 삶에 오랜 물결로 출렁이고 있었음을,
지금 서울의 한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그가
지난 해 다른 제자들과 이 산골까지 찾아왔을 때 알았더랍니다.
교수자의 몸짓 하나가 한 사람의 생을 얼마나 어마어마하게 바꿔놓을 수 있는지...
음악을 하겠다던 그였는데, 선생이 되었지요.’
중부지방 소도시의 한 사립대에서 남도 끝단의 국립대로 자리를 옮겼고,
지난해 퇴직을 하고 뭔가를 준비 중인 해.
당신이 번역하셨던 책의 출판사를 통해 소식을 듣다.
내 책도 내드려야겠다. 교직과목을 가르치셨더랬다.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하며 생이 간다.
좋은 사람이어야겠다고 누군들 생각지 않을까만
관계가 어디 그렇던가.
하지만 마지막까지 내 할 바를 다하는,
그러니까 정성을 놓지 말아야겠단 생각.
바깥수돗가 김장 남은 흔적들을 치웠다.
큰 대야란 대야와 들통은 다 나와 있었다.
다음에 바로 쓰려면 잘 갈무리해두어야 한다,
‘무식한 울 어머니’는 늘 그러셨다.
쉬운 말이지만 좋은 말씀이고 귀한 말씀이다.
좋은 말과 귀한 말은 또한 쉬운 언어, 단순한 행위라는 말이기도 할 게다.
사이집 바깥도 겨울 준비 한 가지 하다.
지난해 아주 비워두었던 사이집은 수도계량기가 깨졌더랬지.
그 추웠던 겨울 무산샘은 여러 차례 달골을 드나들었다.
수도계량기도 그가 갈았더랬다.
여기 검침을 하는 것도 아닌데 굳이 계량기가 뭔 필요일까,
집을 짓던 당시는 그게 없으면 또 안 되는 상황이 있었던 모양이다.
학교에서 고무 물통 하나 올렸다.
계량기 안도 뽁뽁이며로 단단히 감쌌지만
다시 공기층을 만들어주고 보온재를 넣고 고무통을 엎어두다.
겨울에서는 어차피 쓰지 않는 고무통이니
그곳이 제자리이겠거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