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종일 내리던 비는 새벽에 눈이 되었다.
일어나니 땅을 살짝 덮은 눈.
산 위에는 상고대가 눈 시렸다.
오후에는 본관 앞 꽃밭 앞을 긁다.
꽃밭을 구분 짓고 있는 울타리돌이 때깔 났다.
3월에는 꽃밭의 돌이며 흙이며 죄 긁어내려한다.
슬픔도 시간 속에서 풍화되는 것이어서, 30년이 지난 무덤가에서는 사별과 부재의 슬픔이 슬프지 않고
슬픔조차도 시간 속에서 바래지는 또 다른 슬픔이 진실로 슬펐고, 먼 슬픔이 다가와 가까운 슬픔의 자리를
차지했던 것인데, 이 풍화의 슬픔은 본래 그런 것이어서 울 수 있는 슬픔이 아니다.
우리 남매들이 더 이상 울지 않은 세월에도 새로 들어온 무덤에서는 사람들이 울었다. 이제는 울지 않는
자들과 새로 울기 시작한 자들 사이에서 봄마다 풀들은 푸르게 빛났다.
김훈의 <바다의 기별>에서 옮겼던 글을 생각했다.
이제 더는 슬퍼하지 않음이 슬프다거나 하는 글 자체의 의미보다
우선은 봄이기 때문이었고,
물론 문장의 아름다움 때문이었겠고,
다음은 마른 잎들 때문이었다.
먼 슬픔이 가까운 슬픔의 자리를 차지한다는 대목이
마치 지난여름 뜨거운 시간의 푸름들이 이 봄의 순들로 자리를 대체하는
그 순환이 아리게 다가왔던 듯도 하다.
떠나는 시간은 떠나게, 오는 시간은 그저 오게 하라,
말려도 떠나고 막아도 올 것이니.
3월은 달마다 셋째 주에 하는 물꼬주말수행(물꼬stay)도 마지막 주의 빈들모임도 없이 지나기로.
낮에는 노동하고 밤에는 글쓰기로.
마침 바깥수업도 없는 때라.
방문과 상담도, 위탁교육도 모두 4월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