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내린다.
봄이 머잖은 곳에서 건들거리고
순들이 저마다 옴지락거리는데,
종일 글은 되지 않고 글을 써야 한다만 남았다.
도대체 무슨 배짱으로 달포 만에 책 한 권의 원고를 보내겠다 했단 말인가.
믿는 3월이었는데, 3월이 배신 중이다.
그래도 때가 되면 밥상을 차리고 설거지를 하고 청소를 하고, 집 안팎을 살핀다.
외할머니는 딸이 다섯이었다.
막내딸은 나와 나이차가 그리 많이 나지 않는 내 막내이모다.
이모가 뭔가로 퉁퉁거리면 할머니 그러셨다.
네가 밥을 먹고 하는 일이 없으니까 그러는구나.
오늘은 문득 그랬다, 내가 밥을 먹고 하는 일이 없으니까 괴로운 갑다.
물꼬에서 사는 시간에는 넘치는 일로 그런 게 없는 걸,
출간계약서에 찍은 도장은 분명 일인데 ‘하는’ 일이 아닌 것만 같다.
나이 스물에 읽던 장 그르니에의 <섬>을 나는 지금도 읽는다.
아직 스물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나 보다.
지금의 내게는 구박을 못하고 스물의 나를 업시름한다.
나는...... 오늘 아무것도 하는 일 없는 공백의 페이지다. 완전히 공백 상태인 오늘만이 아니다.
내 일생 속에는 거의 공백인 수많은 페이지들이 있다. 최고의 사치란 무상으로 주어진 한 삶을
얻어서 그것을 준 이 못지않게 흐드러지게 사용하는 일이며 무한한 값을 지닌 것을 국부적인
이해관계의 대상으로 만들어 놓지 않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