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3.27.흙날. 비

조회 수 369 추천 수 0 2021.04.27 23:25:36


 

휴일이다.

대처 식구들도 들어와 있고.

밖은 비 내리고

그런 날이라고 이 멧골에 일이 없는 것도 아닌데,

그래도 창 아래 앉아 수를 놓았네.

어둑한 집안이지만 책을 읽는 것도 아닌데 불을 켤 것까지는 아니었고.

대처 식구들 집에

등받이 쿠션 하나가 낡을 대로 낡아 잇을 벗겨내고 솜만 한동안 놓여 있었다.

엊그제 천을 하나 마련하고 재봉질을 했는데,

수를 놓자고 보니 색이 진해 도안을 그리기가 불편했더랬다.

되는 대로 꽃 몇 송이를 놓았고,

오늘은 잎사귀 몇 개 놓았다. .

 

비 내리는 날이면 기회를 엿보는 일이 또 있지.

데크 청소.

달골 햇발동 베란다 쪽 데크는

지난해 비 많았던 장마를 거치며 녹조류가 덮고 있었는데

손이 가기 쉽지 않았다.

솔로 박박 문지르면 속이 시원하겠는데,

나무라 그러기엔 흠이 너무 많겠고,

하여 수세미로 겉만 밀리도록.

시간을 미는 일이었네.

화분들 다 들어내고 하는 청소는 아니었고,

야외 테이블 아래쪽이며 둘레만 밀고 한바탕 물 뿌려주고 쓸고 그만.

 

비 내리는데 우산 쓰고 기락샘과 습이들 산책을 시킨다.

물꼬가 비어있는 시간, 그들이 아이들이다.

학교 안을 한 바퀴, 사택 간장집 앞으로 해서 고샅길 지나 마을 신작로를 빙 둘러

마을 쉼터를 지나 학교 뒷마을 댓마의 이웃 개를 만나고 다시 학교로 들어오는 길.

이런! 하필 길가 누구네인가 항아리 같은 걸 묻은 위에 천막을 씌워둔 곳 가까이에

제습이가 똥을 누었네.

다른 곳들이야 시골 풀섶이라 길 안쪽이 아닐 땐 그냥 지나간다지만

이건 딱 욕먹기 좋은 각일세.

습이들을 묶고 얼른 다시 가서 치우다.

 

해마다 한 차례는 오는 대게 선물이다.

갯것이 귀한 깊은 멧골이니까.

오늘 대게 16마리가 들어왔다.

힘내란다. 물꼬 일도 일이고,

요새 진척 없는 글쓰기에 기진맥진한다는 소식 들으시고.

원고마감은 다가오고,

그렇다고 글만 쓰고 있는 것도 아닌데, 글만 쓰고 있을 이곳 삶도 아닌데.

대처 식구들이며 고개 너머 논두렁까지 건너왔다.

30인분과 50인분, 대게는 물꼬의 압력솥 두 대에 딱 찼다.

침묵이 흘렀다. 대게 발려 먹는 소리만 났다.

대게를 가장 맛있게 먹는 방법이었다.

제 게를 저가 발라먹기, 선언과 함께 모두 전투적으로 먹었네.

이미 세 마리로 목까지 찼다 싶은데

이웃이 와서 혼자 먹는 앞에서 같이 대작하듯 또 한 마리,

속이 불편하다 싶더니 수해 만에 게워내는 일이 다 있었더라.

대게, 대게 노래를 부르다가 원 없이 먹었다.

어릴 적 우리 외할머니가 방학에 모인 어린 손주들에게

다시는 먹고 싶지 않을 만큼 큰 솥단지로 달걀을 삶아주었던 그때처럼.

달걀 흔하지 않던 그 시절에.

그래서 손님이나 오거나 집안 가장 어르신 상에만 놓이고는 하던.

그 전에도 그런 게 있었는지는 잘 생각나지 않지만

적어도 그 뒤로는 우리들이 달걀 탐 같은 건 없었던 듯.

뭔가에 흠뻑 그리 젖고 나면 더는 귀하지 않게 되고는 한다.

우리 아이들도 아쉬움이 남지 않을 만큼 놀 시간이 있으면 좋겠네.

어여 물꼬들 오려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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