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졸음에 겨워 아침뜨락을 걷고 나왔다.

아침 9시에 마감키로 한 원고를 퇴고하며 밤을 지새우다

너무 눈이 감겨 나갔던 참이다.

 

그야말로 딱 9시 맞춰 마감을 하고 그대로 쓰러지다시피하려는데,

부고가 들어왔다.

, 못 가겠구나...

이렇게 지쳐버렸고, 바로 단식도 시작했고...

단식 때 굳이 피하는 한 가지를 꼽자면 운전.

속도를 천천히 한다해도 뭔가 튀어나오거나 갑작스런 상황에서

눈이며 감각이 삐꺽할 수 있으므로.

두어 시간 눈을 붙이고 정신이 들었다.

 

조문을 갈 수 있겠다. 벌써 저녁답, 비까지 내리기는 하나.

어제만 해도 원고 마감 때문에 못 갔을 길이다.

내일이라면 단식 이틀째라 엄두를 내지 못할.

오늘이어야 가능한 일이다. 부음이 닿는 게 오늘이어야 했다.

(가신 분이) 다녀가란 말이구나 싶었다.

왕복 다섯 시간의 길이다.

갔다.

돌아가시기 직전 물꼬를 두 차례나 다녀가셨다.

어머니 당신을 모시고 왔던 선배의 누이들과 반가이 인사하는 사이가 되었다.

가신 님은 그렇게 우리 모두를 서로 엮어주고 떠나셨네.

내내 마음에 머물던, 멀리 멕시코로 떠나있다 들어온 후배도 와 있었다.

그 먼곳에서도 물꼬에 후원을 한 십 년 논두렁이다.

장례식의 큰 미덕 하나는 우리 모두를 불러 모으는 것.

어무이! 어무이 좋아하시는 옥선생 왔네요.”

선배가 빈소에서 어머니 영정에 고했다.

마지막 자리로 불러주신 어머니셨네.

헌데 신비하기도 하지,

선배가 식탁의 맞은편에 앉아 손전화를 들여다보는데,

, 돌아가신 어머니와 너무나 닮아 깜짝 놀랐다.

마지막으로 그렇게 현현하고 가신 당신이었다.

한 어른이 이 얘기를 듣고 그러시더라.

다음에 만날 땐 (선배 얼굴에서) 그 모습이 없을 걸요.

(돌아가신 분들이) 마지막으로 그렇게 얼굴 보여주고 간다고들 해요.”

그러게...

원없이라고 쓰도 될 만치 좋은 우정을 잘 나누고 가시었다.

단식 중이라 대신 물 한 통을 들고 마시다 나왔더라.

자정에야 멧골로 돌아왔다.

긴 세월 물꼬 살림을 살펴주셨던 선배네, 사람 노릇할 수 있었네.

 

단식수행 첫날이었다.

책 한 권의 원고를 탈고하고, 먼 조문을 다녀오고,

조금 무리하게 시작하는 면이 없잖으나

살살 다스려가며 진행하면 될 것이다.

방만했던 생활을, 영혼을, 다시 만드는 좋은 기회 아닌가.

내일 오후에는 이레 단식 가운데 닷새를 동행할 이가 들어온다.

 

출판사 편집자한테서 문자가 들어왔다.

파일을 열어 <여는 글>을 읽고 나서 울컥하여 눈물이 났다는.

“‘, 왜 이러는 거야 도대체...’

요즘 저는 아이들을 키우는 부모로 여러모로 참 어렵습니다...

순하기만 한 두 아들이 제 몫을 다하려 애쓰는 모습을 보며 안타깝고 대견하면서도

뭔가 불안해진 제 마음 때문에 간혹 아이들에게 큰소리치곤 하는 일상입니다.

우리는 왜 배우는 걸까? 배움이 뭘까?

거대한 게 아니었습니다.

즐겁게 배우고 같이 잘 놀고 같이 잘 먹고 잘 자라 사람노릇 하는 것

말씀처럼 늘 이 생각으로 아이들과 이야기 나누던 엄마가

고등학생이 된 아들 둘에게 던지는 말은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른 모습입니다ㅠㅠ

아이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말을 하고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아이들과 함께 걷고 공을 차고 공부하고 살아 숨 쉬는 경이를 찾아나갈 것이며

무엇보다 아이들을 지키겠다는 생각...

먼저좋은 사람이 되겠습니다...’

이런 말씀들에 제가 정신이 번쩍드는 아침입니다.”

 

그런데, 제일 힘써서 쓴 부분이 여는 글이었다.

이 말은 그 다음 쪽부터는 그만큼 감동이기 어려울 수도 있다는 말.

일단 공을 던졌으니 다시 내게 올 때까지는 잊어도 됨 :)


명상으로 하루를 마무리 하기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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