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 5시가 막 지났을 때 소나기 내렸다.
종일 조금 흐릿했던 하늘.
풀은 방으로도 들어올 기세다.
장독대 풀을 정리하다.
출판사에서 3차 교정지가 왔다.
이 낱말은 전체적으로 수정했다 한다; 멧골->산골
순수문학이라면 뜻을 굽히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까지 할 건 아닌.
어떤 허용이라고 주장도 하겠으나 편집부의 뜻을 따르기로.
전체적으로 표준어 중심.
때로 표준어가 퍽 폭력적으로 느껴지기도.
어떤 말은 방언이어야 그 느낌이 전해진다 여긴다.
20년 전 책을 낼 때는 시집이어서도 그렇겠지만 끝까지 뜻을 꺾지 않았던.
그 일을 후회했다. 전문가인 그들의 의견을 들을 필요가 있는.
우리는 우리 분야에서 또 마지막까지 싸워야 하는 부분이 있는 거고.
이번 교정지는 막바지라 그야말로 스윽 훑으며 되는 일이다.
그런데, 종일 위를 앓았다.
이의 뿌리에 생긴 염증을 가라앉히는 중.
그래야 뺄 수 있는.
소염진통제가 불러온 부작용.
당연히 밥을 먹은 뒤 먹기, 약을 먹을 때 물을 많이 마시는 것도 방법일.
그렇게 했지만 퉁퉁 부풀어 올라 풍선 같아진 느낌.
손발과 얼굴까지 부었다.
(약국이나 병원에 전화하는 것도 방법이었을 걸 미련하게 때마다 약을 먹고 있었네)
주말에 동해의 해안가 마을에 갈 일이.
싸 짊어지고 가서 하룻밤 후루룩 봐야겠는.
대신 좀 뒹구니 곁에 있는 책 하나 쥐게 된다.
대화법에 대한 얇은 책이었다.
원칙이 될 만한 좋은 말을 잘 담아놓았다.
새로운 건 아니었다. 다시 새길 시간을 주는 책.
한참 머문 문단이 있었다.
‘단 하나의 틀’에 맞추기 위해 그동안 내가 쏟아 온 비열과 비굴과 열등감이 온몸을 휩쓸고 지나간다.
옳고 그름의 이분법 아래 나의 옳음만을 강변하고 타자의 그름을 지적하는 일만이 나의 존재가
증명되는 방식이라고 믿고 살아온 시간에 대한 후회와 그 안에서 아슬아슬 삶을 유지해 온
나를 향한 연민에 눈가가 시큰하다.’
저자 자신의 이야기여서, 읽는 내 얘기여서 그랬을 것이다, 머물게 됐음은.
온갖 남의 이야기를 끌어다 놓은, 거기다 다 무슨 외국의 유명한 이들 말의 종합세트,
그런 말은 공허함이 있다. 거부감도 좀 있고.
자신의 삶에서 길어 올린 말이 그 세트들보다 더 힘을 가질 수도 있을.
비로소 저자의 말이어서 내 안으로 들어왔다 할.
자신의 여림(vulnerability)을 드러냈기에 또한 더 다가왔을 수도.
우리 모두 그러하니까(여리니까),
그래서 서로 보듬어주어야지 않느냐는 측은지심이랄까 연대랄까 그런 마음이 일었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