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1.21.해날. 흐림

조회 수 390 추천 수 0 2021.12.24 00:01:02


해건지기.

살펴 오시라!’, 오는 걸음에도 따순 기운을 보내다.

12일 상담을 들어오는 가정. 아홉 살 아이와 엄마.

 

학교로 내려가기 전 햇발동부터 살폈다.

어제 청소하고 이불도 확인했으나 그래도 빠진 게 있는가 하고.

햇발동과 창고동 사이 구름다리와 현관에 걸레질을 놓쳤네.

2층 마루 창틀도 닦았다.

어제부터 틀어둔 보일러로 집은 온기가 돌았다.

 

2시에 들어오기로 했는데, 3시가 넘어 닿았다.

황간 나들목을 지나쳐 추풍령까지 내려갔다가

휴게소에서 돌아나오다 식사를 챙겼더라지.

늦어도 될 낮밥이었으면 예서 따순 밥 드시게 할 걸.

덕분에 나는 그제야 여유로이 밥을 먹었다.

일정이 바로 이어졌으면 지나쳤을 허기.

 

학교 한 바퀴’, 이맘때 더욱 황량한 이곳인데,

아이들의 빛나는 이야기도 구석구석 많은데,

안내하는 이도 듣는 이도 혹 회색빛이 되지는 않았는지.

차 타고 달골도 들리다.

한 번 둘러보면 낼 아침 걷는 시간에 더 익숙할.

자꾸 날씨가 마음에 걸려서도.

내일 비가 잡혔던데, 그러면 아침뜨락을 걸을 기회를 놓칠지도 모르니.

하얀샘이 잠깐 걸음해 경사지들 풀을 좀 정리하려 했으나

한참 쓰지 않았던 예취기가 또 말썽을 부렸다.

말 안 듣는 나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저녁밥상.

이 가정은 밀가루와 우유와 달걀을 먹지 않는다고 했다.

대체 재료들이 없는 것도 아니겠지만

그것들은 아이들 밥상에 아주 흔히 쓰이는.

밥상이 자꾸 마음 쓰였네.

현미밥에 고구마를 넣어서, 된장찌개를 끓여 같이 내고,

불러놓았던 고사리를 볶고, 고구마줄기는 들깨가루를 넣어 볶았다.

무가 좋은 때이니 무생채, 감자채볶음, 닭고기야채볶음, 지고추무침, 김치볶음.

아이들 좋아하는 떡볶이는 아 글쎄 밀떡만 있네, 이건 지나치고,

달걀말이나 찜? 아차, 이것도 지나치고,

김치전? ! 이것도 밀가루, 그렇다고 쌀가루는 마침 없고,

, 도토리가루와 묵가루가 있네, 하지만 이미 반찬이 여럿인 걸.

도착이 늦어 물꼬 투어 끝내고 먹지 싶던 난로 위 군고구마를 못 먹고 지나쳐

사과와 함께 후식처럼 냈네.

준비물로 알린 반찬을 못 챙겨와서 미안해라 하는데,

냉장고에 있는 거라곤 김치였다고, 그거라도 가져올까 했다고,

가져오진 못했지만, 어찌 아셨나, 우리 김치 떨어진 줄.

이런 것조차 괜스레 통한다 느꼈던.

여기 오는 과정도 그렇더니.

오려면 얼마나 어려운 걸음인가, 먼 이곳이라.

이 맘 때는 날씨가 또 문제라.

해서 겨울90일수행 동안거동안 방문객을 안 받는.

그런데 용케 이리 딱 서로 만남이 허락되었더라지.

 

밥상을 물리고 차를 마시다.

겨울밤 따순 차는 또 맛나지.

홍차 다즐링 잎차를 달이다.

실타래가 이어졌다.

달골에 올라서도 햇발동 거실에서 밤 10시까지 이어진 실타래’.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아이 엄마는 바느질을 이어갔네.

물꼬에서도 얘기를 나눌 때 늘 노는 손으로는 뭔가를 하자 하지.

뜨개질을 하거나 마늘을 까거나 감자를 벗기거나 콩을 가리거나...

딱 그런.

 

내일 아침은 아이 일어나는 시간에 우리도 맞추기로.

집에서 07:30 일어난다지.

그 시간 깨우겠노라 하였네.

아이와 엄마를 들여다본 적바림 몇 줄을 적으며

장 루슬로의 '다친 달팽이를 보거든'을 생각했더라.

 

 

다친 달팽이를 보거든

 

섣불리 도우려고 나서지 말라

스스로 궁지에서 벗어날 것이다

성급한 도움이 그를 화나게 하거나

마음을 다치게 할 수 있다

 

하늘의 여러 시렁 가운데서

제자리를 벗어난 별을 보거든

별에게 충고하지 말고 참아라

별에겐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라

 

더 빨리 흐르라고

강물의 등을 떠밀지 말라

강물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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