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양양고속도로였다.
양양에서 출발해 가평 설악에 들러 선배네 커피공장에서
보이차며 유기농설탕이며 목공에 쓸 나무들을 잔뜩 얻어 실었다.
15:33 설악발.
동서로 난 고속도로에서 서울방향은 해가 눈을 찌르고 있었다.
차들이 밀렸으나 그리 더딘 속도는 아니었다.
금남터널을 앞두고 삼중추돌 사고가 앞에 있었다,
터널의 어둠 앞에서 차들이 깜빡이를 켰지만.
앞차가 사고 앞에서 급정차,
그 차를 내 차가 들이받고 말았네.
위로 아래로 에어백이 터지고, 김은 오르고, 차들이 빵빵거리고.
일단 사고차량들이 터널을 지나 화도 나들목에 다 모였다.
내 차는 시동이 켜지지 않아 견인차가 끌었다.
같은 장소에서 이 날만도 벌써 몇 차례 사고가 있었다 했다.
사고 차를 보내고,
공업사에서 오늘 당장 내주겠다는 탈 차를 내일이면 다른 차로 교환한다 하기
(세상에! 영동까지 와서 다시 차를 바꿔간다고.)
당장 운전이 편치 않기도 하겠기에 하룻밤을 사고현장 가까이에서 묵기로 해서
내일 받기로 하다.
몸은 말짱하다 할 만했다, 하루이틀 지나봐야 한다더라만.
양쪽 무릎의 가벼운 통증, 오른 쪽 다리에 난 몇 군데 긁힌 상처와 멍,
어깨와 목이 뻐근한 정도.
머잖은 곳에 사는, 오랜 벗인 선배가 달려와
당장 학교로 돌아갈 짐들만 빼서 선배 차에 옮겨 싣고
한의원부터 가서 침을 맞고 파스도 좀 붙이고
편한 숙소까지 잡아주어 잘 쉬다.
이튿날 또 달려와 사우나도 데려가다.
가까이 돔하우스 전시장도 하나 있어 둘러보고.
(이건 올 가을에 마무리를 지었으면 하는 명상토굴방 때문에)
크게 다치지야 않았지만 차에 적잖은 충격이 있었던 사고라 정신이 좀 없었다.
영동으로 돌아오는 길, 한 졸음쉼터에서, 앗, 그제야 랩탑이 생각났네.
없다. 머리가 하얘졌다. 거기 책 원고들이 다 들어있는!
오늘 중요한 모임이 있던 선배한테 부랴부랴 연락해서
그 차 안도 찾았으나 없었다.
“까만 가방이라 잘 안 보여 트렁크에서 안 꺼냈을 수도 있어요!”
다시 내가 끌고 있는 차(선배 차에서 이 차로 다시 짐을 옮긴)를 확인해도 역시 없다.
그렇다면? 사고 차에서 짐들을 꺼내 도로 곁에 놓을 때 분명 내렸는데,
선배 차로 실을 때 마지막에 남겨진 랩탑 가방이 생각났다.
“내가 거기로 가볼게.”
선배가 화도 나들목까지 움직이겠다고 했다.
그때, 혹시나 하고, 견인차에 연락했다.
그 차가 또 마침 사고 차 가까이 가 있었네.
내 차 안을 확인케 했다.
있었다!
아니, 그렇다면 내가 그 도로 가에 남겨두었던 듯했던 까만 가방은 무엇이었던가?
그제야 상황이 생각났다. 도로 가에 내려두면 혹 잊고 못 실을까 하여
선배 차가 오고나면 랩탑을 내리리라 하고 그건 사고 차에 그대로 남겨두었던.
아, 사람이 기억이란 게 이렇다. 그리 터무니없기도 하다.
“영경이가 좀 어리숙하잖아. 여자지, 세상물정 잘 모르지, 딱 호구였지!”
선배가 말했다.
재밌게도 남편이 그 직전 한 통화에서 그런 말을 했더랬다,
멀리서 걱정만 많을까 싶어 아직 사고 소식을 전하기 전.
“어디서 호구되고 있는 건 아니지?”라고.
아, 나는 호구였다.
(나는 사전을 다 찾아보았다. 호ː구 (虎口) 【명사】 어수룩하여 이용하기 좋은 사람의 비유.)
고속도로 사고 시 사업업체를 경계하란 말을 누누이 들어왔건만.
사설견인차와 보험사 직원 간의 농간,
대기업 수리공장인 양 눈속임을 한 명함 따위들에
사고 차를 맡기며 애를 좀 먹은 일이 있으나
엄청난 견적서를 받은 뒤 마지막에 내가 사는 지역으로 가겠다는 강경한 태도에
견인차가 우리 지역까지 사고 차를 끌어다주었다.(마석-부천-영동)
“고객님이 저를 전적으로 믿고 맡겨주셨던 만큼 저 역시...”
비용을 따로 청구하지 않겠다는 자신의 말을 지켜준 멋진 견인차였다.
사실, 거래를 한 것.
보험사 직원과 사설 견인차의 결탁, 대기업 이름을 판 공업사 들을 문제 삼지 않기로 한 것.
하지만 그렇더라도 정말 그들이 돈을 내놓으라 하면 내가 무슨 수로 그걸 안 낸단 말인가.
신의를 지켜준 그가 고마웠다.
밤 1시에야 정비공장에 차를 넣고,
마침 주말이라 기락샘이 와서 그 차편으로 대해리를 들어오다.
공업사에서 내주었던 차는 돌려주어야 하니 거기 두고.
탁송기사가 와서 실어간다지.
학교에 들러 짐을 부리고 찌개도 끓여놓고 부엌살림을 살피고 달골 닿으니 새벽 3시.
비로소 발을 뻗는다.
긴 긴 이틀이었다.
그나저나 수리공장에 한가위 무렵부터 사고차량이 넘쳐(아, 큰 수해도 있었지!)
벌써 30대가 줄을 서고, 휴일 지나 20여 대가 또 들어온다며
대차해줄 차가 없다 했다.
지역도서관에서 9월 독서의 달에 있는 작가초청강연이 해날이다.
제 사는 지역에서 하는 강의가 더 마음이 쓰이는 법인데.
다행히 주말이라 기락샘이 움직여주기로.
달날에는 어떻게든 차를 구해보겠다는 공장 측.
낡은 경차라도 어찌 해보겠다는.
달날 아침에 사고 차량 입고시키고 연락을 주겠다 했다.
그것조차 안 되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
내가 가해차량이라 보험에 렌터카가 포함되어 있지 않은.
달골과 학교를 오가는 거야 차 없이 어려운 길이 아니나
주에 두 차례 밖에서 있는, 지난주부터 이번 학기에 하기로 한 기술교육이 곤란하네,
대중교통으로는 어림없는 일.
이런 것도 병원처럼 시골 사니 어려운 문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