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2.19.해날. 맑음

조회 수 350 추천 수 0 2023.03.15 23:58:33


우수였네.

어제오늘 학교의 꽃밭 둘레 마른 풀들을 검다.

 

나는 오늘 쓰기를 어린 쌍둥이 형제에게서 배운다.

전쟁을 피해 할머니 집에 맡겨진 형제.

이 년 반 동안 학교에 다닌 게 끝인 그들은 독학으로 공부를 계속하기로 한다.

작문연습으로는 서로에게 제목을 주고 두 시간 동안 쓴 뒤 서로의 글을 바꿔서 본다.

사전을 찾아가며 철자법을 고쳐주고,

끄트머리에 잘했음 잘못했음 따위의 평가를 써준다.

그들의 평가를 결정하는 데에는 아주 간단한 기준이 있다.

그 작문이 진실이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것들, 우리가 본 것들, 우리가 들은 것들, 우리가 한 일들만을 적어야 한다.’(p.35)

할머니는 마녀와 비슷하다고 쓰지 않고

사람들이 할머니를 마녀라고 부른다라고 고친다.

이 소도시는 아름답다라는 표현도 금지되어 있다

왜냐하면, 이 소도시는 우리에게는 아름다울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추하게 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당번병은 친절하고고 쓰지 않는다.

그들이 모르는 심술궂은 면도 있을 수 있기에.

그들은 당번병은 우리에게 모포를 가져다주었다.’라고 쓴다.

그들은 호두를 좋아한다고 쓰지 않고 호두를 많이 먹는다라고 쓴다.

좋아한다는 단어는 뜻이 모호하고,

거기에는 정확성과 객관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진술한다.

감정을 나타내는 말들은 매우 모호하다. 그러므로 그런 단어의 사용은 될 수 있는 대로 피하고

사물, 인간, 자기 자신에 대한 묘사, 즉 사실에 충실한 묘사로 만족해야 한다.’

이런 묘사만이 좋은 글을 이루는 건 당연히 아니다.

하지만 이 훈련은 게을러지는 글을 부지런하게 만든다.

나를 그 현장으로 가 있게 하는 글,

내 앞에 그 현장이 그대로 살아나는 글,

그런 연습을 나도 하리라 한다. 이제? , 이제라도.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을 쥐고 있었다.

완결본으로 썼던 1비밀노트에 이후 2부(‘타인의 증거’),3(‘50년간의 고독’)를 붙여 냈다.

오래된 중고책서점 신고에서 발견했고, 샀다.

그의 단문을 좋아한다.

1부의 마지막, 그만 툭 떨어져버리는 마지막 쪽을 사랑한다.

아버지와 형제는 국경을 넘는다.

아빠는 두 번째 철조망 직전에 쓰러져 있다.

그렇다. 구경을 넘어가는 방법이 있기는 하다. 누군가를 앞서가게 하는 것이다.

마대를 쥐고, 앞서 간 발자국을 따라간 다음, 아빠의 축 늘어진 몸뚱이를 밟고, 우리 가운데 하나만 국경을 넘어갔다.

남은 하나는 할머니 집으로 돌아왔다.’

충격 결말은 이럴 때 쓰는 표현이다.

2부와 3부는 1부의 그 팽팽함을 담지 못해 아쉬웠더랬다.

같이 책을 읽은 아들은 그랬더랬다.

“(1부를 지나니 책이) 왜 이래?”

2, 3부도 나름 재미가 있을 것이나

1부를 따르지 못한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속편이 재미없어진 영화 같은.

본편만으로 충분했던 그런.

책은 읽는 자의 몫이니 또 다른 이들은 또 다를 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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