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오시다

조회 수 1030 추천 수 0 2003.04.02 00:59:00
핏물과 양념에 범벅된 엘에이갈비.
그예 외손녀들의 입에 넣고싶은 아버지 잔정이
왜관까지 발걸음 이끌다.

몇번이나 갈아타는 번거로움도 마다않고,
천성이 게으르고 유약한 아버지가
쑥갓에 갓 동동 띄워 향내 그윽한 엄마표 물김치까지 봉지봉지 넣고,
이것 조금, 저것 조금 라면상자 하나를 들고오시느라
아버지 얼마나 힘드셨나.

오랜만에 친정붙이를 본 딸은
부산을 떨어드린다. 맘껏 보여드린다.
아이구, 뭘 이렇게나.....제법 무겁네, 영차 영차..
천석꾼의 장남으로 한평생 마마보이로, 물려받은 논밭을 끌어안고
살아오신 아버지 인생.
그 많은 투정과 엄살을 받아내느라 엄마 허리가 얼마나 휘었는지
이제는 아실라나.
슈퍼에서 사온 복분자 술을 권하며 말벗을 자청하는 딸을 앞에 두고
갑자기 안방 전화기를 잡는다.
엄마에게 호통치신다.

꿀병단지에 넣은 땅콩조림!
이자식...
왜 너는 라면상자에 좀 알아서 들어가지 않고, 또 할아버지 할머니 속을 썩이니......

아버지는 못내 분을 못 삭이고,
복분자 술대신 막걸리를 드신다.
급하게 대접할것도 뭣도 없이 구워드린 정구지부침개 안주삼아
딸앞에서, 또 그 딸의 딸들 앞에서
우리 노래 부를까, 춤출까.
지갑을 꺼내고 외손녀들의 장기자랑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낸다.

별거와 이혼.
애정없는 결혼생활이라면 그만두어라.
로맨티스트 아버지답게 나에게 조언하셨지만
또 어쩔수없는 부정이 막걸리 트림처럼 간혹 나온다.
하지만 딸은 냉정하다.

입 댈것도, 손 댈것도 없이 자라준 하나있는 고명딸.
그 딸의 아버지는 조촐한 막걸리와 엘에이 갈비구이를 앞에 놓고
참 담담하다.
딸의 딸들은 오늘도 꽥꽥거리며 외할아버지에게 받은 용돈 몇장을 들고
입이 찢어지는것도 잠시,
냉장고에 자석으로 붙여둔 요리 설명서를 보며 과자를 구워달라고 생떼를 쓰고 아파트의 저녁은 오늘따라 부산하다.

우유에 치즈 녹이고, 버터에 설탕 녹이고.
밀가루가 온 거실바닥에 튀고,
해보자, 해보자 설레발을 치고,
온 손발에 묻고,
그래도 과자는 익는다.
달콤하고 고소한 향내가 진동한다.
시간이 지나니 모든게 다 된다.

아버지는 정신없는 딸집의 저녁 풍경에 마음이 놓이시나 보다.
걱정 한것 보다 낫네, 낫다.
하지만 아버지의 두 눈에 물기가 스친다.
눈물 가득 외손녀들과의 생이별이 비친다.
기약 없는 딸의 앞날이 그저 안스럽기만 하다.
인생살이의 덧없음에 허무함이 솟는다.

아버지의 딸은 까딱도 않고 갈비탕을 끓인다.
오징어 듬뿍 떠서 부침개를 새로 부친다.
그 딸의 딸들은 외할아버지를 기어이 일으켜세워
다리를 벌리게 하고 그 사이를 기어다닌다.
어느새 양복 바지 안에 있던 늘어진 파자마 차림으로 외손녀들의 포로가 된다.
할아버지, 오징어 춤 출줄 아세요?
쏘세지춤은요?

워 창 카일러, 워 창 카일러.
와따시와 우레시, 와따시와 우레시.
아이엠 해피, 아이엠 해피.


만고불변의 아버지 애창곡.
아버지의 딸과 아들이 불렀고,
그 딸의 딸들과 아들의 아들들이 부르고 있는 노래.

나는 기쁘다, 나는 기쁘다. 나는 기쁘다. 항상 기쁘다.

아버지는 기어이 외손녀들을 무릎에 앉히고 중창을 한다.
손녀, 손자들이 돌 지나고 입을 뗄 때,
마침 그 때를 기다리기나 했다는 듯 터져나오는 아버지의 애창곡.
외손녀들은 오늘 기분이 좋다.
외할아버지와 잘 놀아드린다.
그래서 그 엄마도 기분이 좋다.
그러하므로, 갈비탕의 가스불도 줄이지 않고 쌩쌩 돌린다.
내일 아침, 그 엄마의 아버지가 드시고 가도록 양파도 잘게 썰어놓는다.

그렇다.
그렇다.

아버지의 다정함이 나를 키웠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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